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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문인은 아니었습니다만, 평생 동안 올곧은 자세로 고향과 문학과 사람들을 사랑하며 한 세상을 나름대로 알차고 아름답게 사시다가 최근 이승을 하직하신 분이 계십니다. 태안 출신 고(故) 이사형 선생입니다. 태안과 서산은 물론이고, 충남 지역의 문인들 다수가 잘 알고 있는 분이지요. 그러나 충남 지역 문인들 중에도 이사형 선생의 별세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계실 터이기에 소식을 전할 겸, 고 이사형 선생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15일치 <태안신문>에 게재된 제 글을 인터넷 매체에도 올립니다.
고(故) 이사형 선생을 추모하며
평생 사랑했던 고향에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이
태안 토박이들 자존심의 상징과도 같았던 문학인 이사형((李仕炯) 선생이 지난 4일(추석 다음날) 서산중앙병원에서 별세했다. 1936년 생이시니 74년 동안 이승에 머물다가 떠나신 셈이다.
이태 전 부인을 먼저 떠나보내고, 연이어 형수님과 단 한 분뿐인 형님도 떠나보내신 후 외아들 내외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년의 긴 병고와 쓸쓸함을 떨어버리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분이 겪었던 말년의 병고와 외로움을 생각하면, 무심했던 내 잘못이 너무 큰 듯싶고 마음 무거워 오늘 이 추모의 글을 쓰는 일마저 무람없게 느껴진다.
비록 병실을 자주 찾지도 못했고,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친분의 정을 나누고 인생의 중요 부분을 동고동락했던 처지이므로, 그분과의 인연의 질량을 헤아리며 그분의 자취를 살펴보는 것도 후배의 도리요,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사형 선생의 이름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태안중·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함께 했던 기억도 있다. 태고 축구팀의 골키퍼이던 나를 코치해주던 모습, 골문 가운데 서서 두 팔을 벌리고 하늘하늘 춤을 추는 듯했던 모습이 아련하다. 서울사대 중등교원 양성소를 수료하고 서울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자주 고향에 내려온다고 했다.
내가 아는 한 이사형 선생은 서울에서 사는 태안 출향인들 가운데 가장 자주 고향을 찾은 사람일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고향에 정착한 2004년까지 그는 참으로 빈번하게 고향을 찾았다. 서울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그의 관심은 늘 고향에 있었고, 고향의 여러 가지 일들에 관여하면서 때로는 '조종'을 하기도 했다.
내가 이사형 선생과 지연 학연 외로, 문학이라는 분야에서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때는 1985년이다. 그 무렵 이사형 선생은 교직생활을 접고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고교생의 하얀 마음>이라는 중편소설을 책으로 펴내었다. 고향의 친척이자 후배인 이일형씨를 통해 내게 보내주신 그 책을 받자마자 나는 즉시 연락을 드려 이사형 선생을 고장의 문학지 <흙빛문학>에 모실 수 있었다.
<흙빛문학> 제3집에 발표된 <고향은 바람이어라>라는 수필이 최초로 고향의 문학 독자들과 대면한 글이다. 선생은 그때부터 지속적으로 <흙빛문학>에 참여했다. <흙빛문학>은 1986년 제4집에 그해 별세하신 필자의 선친(지동환 님)에 대한 '추모특집'을 마련했는데, 그 특집에 이사형 선생은 기꺼이 참여하여 <지금도 모닥불은 타고 있는데>라는 추모 글을 씀으로써 필자와 남다른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선생은 내가 운영 책임을 맡고 있던 <흙빛문학>의 초창기, 그 어렵던 시절에 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나를 서울로 불러 올려서 태안 출신 여러 유력 인사들에게로 데리고 가거나 만나게 해서 재정적인 도움을 받도록 해주기도 했다.
1992년 근흥면 용신리에 태안 출신 최초 등단 문인인 고 이래수(李來秀) 박사(동국대 교수)의 문학비를 건립할 때도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많은 출향 인사들의 협조를 이끌어내 주셨다. 그때의 은공을 생각하면 지금도 고마운 마음 한량없다.
선생은 1989년 태안군이 복군(復郡)되고, 수많은 고장들에서 그 고장의 지명을 제호로 삼는 문학지들이 속속 출현하는 것을 보자, '태안'이라는 지명을 제호로 삼는 문학지가 필요함을 필자에게 역설하곤 했다. 내가 1994년 <흙빛문학>을 떠나고 4년 후인 1998년 <태안문학>을 창간한 데에는 선생의 작용이 컸다. 재정적인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선생은 <태안문학>에 적극적으로도 참여하면서도 <흙빛문학>과의 인연을 저버리지 않았다. <흙빛문학> 구성원들과의 정리도 돈독하게 유지해 나갔다.
선생은 1993년 <충남소설가협회> 창립과 <소설충청> 창간에도 적극 참여해 주셨고, 그쪽에서도 선장 노릇을 하는 내가 겪는 갖가지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려 주셨다. <소설충청>이 초창기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현재 17호까지 펴내고 있는 데에는 이사형 선생의 은공이 참으로 크다.
선생은 1985년 문인으로 얼굴을 내놓은 이후 <흙빛문학>, <소설충청>, <태안문학>, <충남문학> 등에 지속적으로 많은 소설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1999년 최초 창작집인 <아픔 없는 목소리>를 출간할 수 있었다. 이 창작집은 선생의 최초이자 마지막 소설집이 되었는데, 영광스럽게도 나는 그 책의 말미에 '해설'의 글을 올릴 수 있었다.
선생은 1999년 <충남문인협회>가 수여하는 '99년도 '동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에 창작집을 출간하고 충남문협의 동인지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이 '겹경사'는 그대로 <태안문학>과 <소설충청>의 경사로 이어졌다. 선생과 <충남문학>과의 인연은 최근까지 알차게 이어져서 2006년에는 충남문협으로부터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선생의 고향 사랑은 남달랐다. 서울에서 살면서도 고향의 공적인 크고 작은 일들에 물심양면으로 관여하고, 이런저런 고향 사람들을 두루 아끼고 사랑하니, '태안초등학교 총동문회'는 2002년 선생에게 제3회 '자랑스런 태초동문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선생은 2004년 고향으로 내려와 정착한 후에는 <태안신문> 편집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봉사하면서 수년 동안 <태안신문>에 고향을 예찬하고 인정의 이름다움을 노래하는 단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나는 선생의 그 시들을 읽으면서,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노인정을 찾아다니며 노인들께 인사를 하거나 길에서 만나는 아는 노인들 손에 용돈을 쥐어드리곤 하던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선생은 1987년 서울 한강성당에서 세례를 받고(세례명 안드레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등한시해왔다. 그러다가 2007년 부인과의 사별을 전후하여 하느님 신앙을 회복하고, 미사 참례를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외롭고 불편한 몸으로 성당에 와서 오래 기도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내가 태안 기름유출사고와 관련하여 병상생활을 하고 나왔을 때는 내 손을 잡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선생은 말년에 인생의 허무를 깊이 깨달았다. 세상의 그 모든 것이 덧없고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는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과 신앙의 가치를 깊이 헤아리게 되었다. 그는 오로지 하느님 뜻에 순명하고 준비하는 자세로 하느님 품으로 도달해갔다.
평생을 착하고 올곧게 살아온 품성을 잘 유지하는 가운데 하느님 신앙 안에 자신을 온전히 맡겼으니, 그의 삶은 참으로 아름다웠고 성공적이었다. 진심으로 선생의 일생을 찬하며 명복을 빈다.
2009.10.16 10:50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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