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빨래 하지 말라는 세상에서 읽는 책

[책이 있는 삶 118] 누군가를 '조지'면 책이 아니다

등록 2009.10.23 17:38수정 2009.10.2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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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손빨래 하지 말라구?

 

 하루일을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오다가 주안역에서 빠른전철을 내립니다. 몇 분쯤 서서 기다리는데 타는곳 둘레로 라디오 목소리가 흐릅니다. "손빨래는 하지 말고 세탁기로 하며, 무거운 짐은 들지 않도록 하고, 마우스는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쓰고 ……." '뭐야?' 하면서, 읽던 책을 한동안 덮고 귀를 기울입니다. 라디오 목소리는 '셈틀 앞에서 오래도록 지내는 도시 사람이 손목 안 아프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젠장!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았네!" 손빨래가 손목에 안 좋다니, 그저 전기 먹는 기계를 끝없이 쓰고 또 쓰라는 소리인가? 걸레조차 빨지 말고, 걸레질조차 하지 말라는 소리인가? 설거지는? 밥하기는? 자전거 타기는? 걷기는? 무거운 짐을 들지 말라는데, 이삿짐 나르는 일꾼이나 도매상 일꾼은 어쩌지? 책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이 키우는 엄마 아빠는? 아기를 안을 생각은 접고 아기수레에만 태우고 끌고 다니거나 자가용에 태우고 다니라고?

 

 제 귀에만 터무니없다고 들리는지 모르는 소리를 그만 듣고, 《하얀 능선에 서면》을 쓴 남난희 님이 2004년에 내놓은 《낮은 산이 낫다》를 다시 집어듭니다. 느린전철을 타고 도원역에서 내립니다. 밤골목 거닐며 사진 몇 장 찍다가, 배다리에 마련해 꾸리고 있는 동네도서관에 들러 이곳에 놓고 있던 스캐너를 떼어 가방에 넣고, 몇 가지 책을 챙깁니다. 다시 밤골목을 거닐며 집으로 갑니다. 김밥집에서 김밥 석 줄 삽니다. 제가 먼저 말하기 앞서 김밥집 일꾼이 까만 봉지에 착착 담아 버립니다. 빤히 어깨에 천가방을 걸어 놓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이런 가방이 있는지 없는지 들여다보지 않고 따로 묻지 않습니다. 집 앞 구멍가게에서 보리술 두 병을 삽니다. 젊은 일꾼이 까만 비닐 꺼내는 모습을 보며 얼른 손사래칩니다. 젊은 일꾼은 입맛을 다시며 까만 비닐을 구겨서 제자리에 쑤셔넣습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찬물로 씻고, 아침에 1권을 읽은 만화책 《크로스게임》(아다치 미치루 글ㆍ그림) 2권부터 7권까지 읽어내립니다. 졸음이 쏟아져 그대로 곯아떨어집니다. 아침에 일어나 8권부터 10권까지 읽어치웁니다. 뒤엣권은 오늘 저녁에 만화책방에 들러 장만할 생각입니다.

 

 아침에 서울로 일하는 가는 전철길에 다시금 《낮은 산이 낫다》를 집어들어 읽다가 빈자리에 끄적끄적 이 생각 저 얘기를 적바림합니다. 문득, 남난희 님 글책이나 아다치 미치루 님 만화책이나 꾹꾹 눌러 쓰고 눌러 그린 손글이요 손그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는 손글과 손그림 아닌 셈틀글과 셈틀그림으로 바뀔는지 모르지만, 이이들은 셈틀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도 손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던 맛과 멋을 잃지 않겠다고 느낍니다. 우리 두 손으로 글이며 그림이며 사진이며 일구고, 밥하고 빨래하고 치우고 쓸고닦으며 아이 돌보기까지 하는 가운데 김매기나 살림 갈무리를 하겠지요. 손으로 일하는 만큼 손힘 닿는 데까지 애쓰겠지요. 퍽 고되게 일하기도 할 테지만, 손품 팔 수 있는 테두리는 넘기지 않을 테고요. 우리한테는 오늘 하루만 있지 않고 늘 새로워질 기나긴 사람길과 사랑길이 있으니까요.

 

 

 ㄴ. 누군가를 '조지'면 책이 아니다

 

 "나는 시계를 본다. 화요일 새벽 1시 10분. 1월도 한참 지났는데 눈이 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는다.(131쪽)" 1999년에 나온 《맥시멈 코리아》(자작나무)라는 책에는 미국사람 하나가 관광객이 아니요 손님 또한 아닌 눈으로 한국땅에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맨 처음에는 《Bug》를 냈고, 다음으로는 《발칙한 한국학》을 냈으며, 《대한민국 사용후기》까지 낸 다음에, 얼마 앞서 《더 발칙한 한국학》을 내놓았습니다.

 

자그마치(?) 열 해나 묵은 책인 《맥시멈 코리아》를 헌책방에서 찾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꽤나 해묵은 이야기가 담겨 있구나 싶으면서도 요모조모 생각할 대목이 묻어 있다고. 그렇지만 처음 책을 손에 쥘 때에는 별 다섯 만점에 하나 반 줄까 말까 한 생각이 들었고, 131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별 셋을 주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스콧 버거슨 이이는 깊어가는 밤을 잊도록 하는 동대문시장에 내리는 눈발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니까요.

 

 아침나절 여느 때처럼 늘 붐빌 뿐 아니라 미어터지는 지옥철에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휩쓸리고 허둥지둥하면서 《맥시멈 코리아》를 움켜쥡니다. 책을 읽는 내내 옆에 있는 사람들 몸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를 느낍니다. 전철에서 내려 한글학회로 걸어가는 길에서는 '꽤 빨리 걸어가면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 냄새를 느끼며 속으로 '저 개새끼들!' 같은 말마디가 튀어나옵니다. 문득 엊그제 술자리에서 만난 어떤 분들이 "최종규 씨는 담배 안 피워?" 하고 묻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저보다 어른인 분들 앞이었기에 싱긋 웃으며 "처음부터 안 피웠습니다." 하고만 말씀드렸는데, 제 마음은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피워야 할 텐데, 담배를 옳게 피울 줄 모르는 똥바구니가 너무 많은데 제가 담배를 피울 수 있나요?" 하고 대꾸하고 싶었습니다.

 

 사나흘쯤 앞서 한글학회로 찾아온 어느 시인 할아버지가 한글학회에서 일하는 일꾼들한테 책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시인 할배가 나누어 준 책은 서른 해 동안 법무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한 다음 법무사로 일하는 어떤 할배가 쓴 조각글을 모았습니다. 무슨 책인가 싶어 들추어보니 '노무현 조지기'가 3/4쯤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글쓴이는 온갖 한자를 고스란히 드러내어 "한자말 섞인 글"이 아니라 "한문과 다를 바 없는 글"을 썼습니다. 줄거리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이와 같은 책을 한글학회로 찾아온 시인 할배가 나누어 주는 까닭은? 더욱이 그 시인 할배는 한글을 사랑하고 가꾼다는 일을 하고 있는데?

 

 지난주에 《나대로 간다》(동아일보사)라고 하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쓴 분은 〈동아일보〉에 '나대로'라는 네 칸 만화를 그린 이홍우 님으로, 시사만화가 세상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풍자라고 거듭 외치고 있지만, 정작 당신 책에서 1/3은 '노무현 조지기'에 바칩니다. 이분은 책을 내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나라당 국회의원 공천을 신청하며 신문사를 그만두었더군요. 그래, 저도 노무현 옛 대통령이 잘못한 숱한 일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따스한 꾸지람이 아닌 눈먼 헐뜯기가 된다면, 죽은 분한테나 산 이한테나 도움될 구석은 없을 텐데요.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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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10.23 17:38ⓒ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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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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