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전자기타 솜씨를 자랑하는 김유신씨. 일상을 노래하는 그는 가족과 이웃들 그리고 세상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송성영
가진 게 사람과 음악적 배짱이 전부라 할 수 있는 김유신씨. 그 사내의 음악 블루스는 일상을 노래하고 있었다. 가족을 노래하고 이웃을 노래하고 싸가지 없는 정치꾼들을 뒤틀어 꼬집고 세상의 아픔을 노래 부르고 그 세상에 속해 있는 자신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었다. 고 김남주 시인의 시 '아이고! I Go!'에서 영감을 받아 그 일부를 인용해 만든 노래, '날마다 날마다'와 같은 노래가 그것이다.
1절-차에 깔려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 공부못해 죽고 취직 못해 죽고/ 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바른말해 죽고 빚더미에 죽고/날마다 날마다 죽음이다/시도 때도 없이 죽음이다 /세상은 온통 공동묘지//그런데 제살길만 찾아가는 내 인생도 죽음이다./2절-꿈 때문에 살고 자식땜에 살고/ 날마다 날마다 살아간다./사람 믿고 살고 사랑믿고 살고/날마다 날마다 재미난다./ 꿈 때문에 살고 공부못해 죽고/자식땜에 살고 빚더미에 죽고/ 날마다 날마다 헤깔린다./ 시도 때도 없이 지랄이다./ 세상아 대체 왜 그러니/그런데 제 살길만 찾아가는 내 인생도 지랄이다 지랄이다./그는 본래 민중운동의 방편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한때 문화운동가로서 노래패에서 활동하면서 파업이나 시위 현장을 찾아다니기도 했고 대전·충남 민예총 음악분과장을 맡아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 음악은 즐기는 음악이라기보다 가치 있는 일이었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그는 민중운동이 잦아들던 90년대 초반부터 새로운 음악에 대한 고민에 빠져 들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전에는 '노래로 그리는 나라'라는 소리패가 있었는데 그게 해체되고 96년도에는 '느티나무'라는 공연 팀이 결성되면서 민중가요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지요."그때 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변했다는 따가운 눈총과 마주 대해야 했지만 나름대로 민중음악이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민중음악에서 비껴나와 대중음악 속으로 들어갔고, 민중음악에 가치를 두었던 활동가로서의 전문성을 갖춘 작곡가로 거듭나기를 원했다.
"새로운 형식의 음악을 하고 싶은 욕심에서 대중음악을 시작했는데 거기에 건강한 내면세계를 가진 음악, 블루스가 있었던 겁니다. 블루스 음악을 접하다보니 대중음악과 민중음악을 분류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블루스는 세상의 모든 민중음악, 대중음악을 품고 있으니까요." 그가 모델로 삼은 인물은 '밥 말리'라는 전설적인 레게 가수라고 한다.
"음악으로써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깨우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고 말하면서 음악의 운동적 가치를 확신했던 밥 말리. 그의 노래는 자메이카의 국가가 되었고, 혼란의 시대에 이정표를 마련해준 범 아프리카 음악으로 널리 알려져 오고 있다.
그는 밥 말리와 같은 음악을 꿈꾸며 국악을 새롭게 만났고 한 때는 민족음악협회의 제안을 받아 가수 신대철,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 등과 함께 청소년 음악캠프를 꾸려 나가면서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힙합에 국악의 만남을 시도하기도 했다. 청소년 음악 캠프를 접고부터는 대전에서 몇몇 후배들과 함께 5인조 밴드를 구성해 녹음실을 운영하면서 술독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녹음실을 운영한답시고 술독에 빠져 지내다보니 몸이 상하게 되었고 거기다가 가족들과도 멀어지게 되고 생활이 엉망진창이 되더라구요. 작곡한 노래도 제대로 정리 못하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녹음실을 접어버리고 무작정 시골 빈집을 찾아 다녔죠."작곡에만 전념하기 위해 1년여 동안 시골 빈집을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갑사 부근에서 다 쓰러져 가는 카페를 만난 것이었다. 지붕에서 빗물이 줄줄 샐 정도로 오랫동안 방치해 놓아 폐가나 다름 없었던 카페였다. 계약 기간 3년이 지나면 쫓겨날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직접 망치를 들고 지붕에 기어 올라가 비바람 막고 때우고 덧대 2층에 살림방을 앉혔고 아래층은 블루스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근사한 카페로 꾸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