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항쟁 후 경성대 진성일은 왜 분신했을까

[잊혀진 저항-10.28 건대항쟁5] 진상규명과 전두환 타도 위해 청춘을 던지다

등록 2009.11.07 18:17수정 2009.11.0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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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일 열사 그는 23살의 평범한 대학생으로서 전두환정권의 독재와 건대항쟁의 왜곡에 대해 참을 수 없어 분신, 투신하였다.
진성일 열사그는 23살의 평범한 대학생으로서 전두환정권의 독재와 건대항쟁의 왜곡에 대해 참을 수 없어 분신, 투신하였다.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
얼마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일해공원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가 졸업한 대구공고에는 모교를 빛낸 동문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진과 약력도 걸려있다는 기사도 있었다.

일해공원과 대구공고 관계자에 대한 비난은 차치하고서라도 민주화가 20여 년이 흐른 현재에서도 독재의 잔재가 곳곳에서 살랑이는 것을 보니 씁쓸하다 못해 참담하다.

12·12 쿠데타를 통해 군부를 장악하고 5·18로 광주를 짓밟아 대한민국을 틀어쥔 전두환은 그가 집권한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철저히 앗아갔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아우성을 좌익용공으로 덧씌워 무참히 짓밟아나갔다.

전두환 정권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은 사람들. 스스로를 내던진 사람들. 평생을 범죄자와 빨갱이의 운명으로 살아야했던 사람들. 그 수가 너무 많아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잊혀진 저항-10·28 건대항쟁>, 다섯 번째 연재에서는 건대항쟁 직후 스스로를 내던진 한 청년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진성일 열사, 전두환 타도 위해 청춘을 내던지다

66시간 50분의 건대항쟁으로 1447명이 연행, 1288명 구속이라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대학생들을 좌익용공으로 매도한 충격의 여파는 애학투련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전국 대학생들에게 분노를 심어주었다.


항쟁 나흘 후인 11월 4일 부산 산업대학교(현 경성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대학생 진성일은 목숨을 내던진다. 시청각관 5층에서 전두환 독재에 대한 저항과 건대항쟁의 진실규명을 외치고 유서를 뿌리며 분신, 투신한 것이다.

당시 그가 뿌렸던 유서는 <산업대 학우에게>와 <건국대 농성사건에 즈음하여> 두 가지이다. 그 중 '건국대 농성사건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유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국대 농성사건에 즈음하여> 


우리 학우들이 용공이니 공산혁명 분자로 몰리고 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손가락 하나 다치면
팔 전체를 잘라내는 그런 일이 되고 있다.

건국대 농성 사건의 1천2백87명. 우리 학우 여러분.
새날이 올 때까지 우리 흔들리지 맙시다.
여러분 주위에는 진정한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용기와 힘을 잃지 마십시오.

저 비록 미약한 존재지만 격분을 참을 길 없어
여러 친구들보다 먼저 갑니다.

부디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싸우십시오.
승리할 그날까지...

"건국대 농성사건 진상보고 하라"
"군부독재 물러가라"
"파쇼 타도!"

진성일 열사 유서 진성일 여사의 유서 원문이다.
진성일 열사 유서진성일 여사의 유서 원문이다.


1986년 진성일, 그리고 2009년 대한민국

진성일 열사는 1964년 1월 26일 부산 출생이다.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부산산업대학교(현 경성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한다.

<유가협>에 따르면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장남으로 자랐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그가 사회에 관심 가지게 된 계기는 군 입대 시절이었다. 당시 흑색선전과 민정당 지지를 강요하는 군 교육에 거부감을 가졌고 그때부터 5공의 정통성과 도덕성에 대한 반감을 품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벌어진 건대항쟁과 부산에서 대학 재학 중인 진성일. 어찌보면 목숨을 내던질만한 개연성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학투련과 아무런 연고 없는 대학생의 분신, 투신은 당시 대학생들이 품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다는 점. 그 열망을 애학투련이 대표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스무셋이라는 젊은 나이. 건대항쟁과 진성일 열사의 분신, 얼마 후 그리고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이어졌고 이들의 죽음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전두환의 장기집권 음모를 축출해낼 수가 있었을까.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숨 쉴 수 있었을까. 역으로 전두환이 없었다면 청년 진성일은 죽을 필요가 없었다. 아마 지금쯤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진성일 열사 영결식 부산산업대(현 경성대)에서 치러진 진성일 열사의 영결식
진성일 열사 영결식부산산업대(현 경성대)에서 치러진 진성일 열사의 영결식

2009년 11월. 그가 죽음을 맞이한 지 23년이 흘렀다. 2009년을 살아가는 대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피땀 흘리고 목숨을 내던졌는지 모른다. 세월이 흘러 현재의 20대는 민주주의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아직 미완의 과제이다. 독재는 국민의 이름으로 아직 처벌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정계는 아직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독재자라는 사실을 지우고 스스로를 포장하려 한다. 또한 이명박 정권은 '용산참사', '미디어법' 등을 통해 이 땅의 민주주의를 훼손시키고 있다. 민주주의의 수혜자이자 대한민국의 구성원이라면 결코 위기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이 길만이 그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며, 그들을 정성스럽게 기리는 일이 될 것이다.
#진성일 #건대항쟁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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