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복지동화] 숲속의 빨간 신호등1 '아기사슴 리초'

도로 위에서 죽임을 당하는 슬픈 동물들을 기억하며

등록 2009.11.11 21:14수정 2009.11.11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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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복지동화 "숲속의 빨간 신호등"을 연재하며

한국은 생태복지지수가 162위라고 합니다. 생태복지란  '생태계와 함께 하는 환경친화적 인간복지'라고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천연기념물인 수리부엉이가 도로 위에서 날개죽지가 부러지며 죽고 고라니가 자동차에 치여 죽는, 도저히 인간과 자연이 하나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 우리는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인간 조금 빨리 가려고 만든 길에 동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죽어갑니다. 이 동화를 창작한 지는 꽤 오래전입니다. 본 작품으로 2007년 '사람과환경' 아동문학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였지만 아직 출판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으로 내기에는 원고지 양이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상업성이 떨어지는 동화입니다. 200자 원고지로 486매에 달하는 내용입니다.

이 동화는 동물들이 자신들의 보금자리 숲에서 어떤 이유로 다른 숲으로 건너가야 하는지, 어떻게 무시무시한 도로를 건너가는지, 정말 동화처럼 창작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참 동물들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땅 대한민국 도로 위에서 죽어간 수많은 동물들을 생각하며 17회에 걸쳐 동화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함께 열린 마음으로 동화를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동화는 어린이들만 읽는 장르의 문학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응원으로 얼개만 짜놓은 그 뒤의 이야기도 쓸 수 있도록 힘을 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림도 없어 더욱 썰렁한 동화이긴 하지만, 혹시 마음의 여유가 된다면 중간중간 그림도 넣어주시고, 더 바란다면 이 동화가 책으로 나와 더 많은 사람에게 읽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바람이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더 따뜻한 세상이길 소망합니다.

1. 아기 사슴 리초

어엄 마아!
아기 사슴 한 마리가 숲 한 가운데서 엄마를 찾고 있습니다. 소리는 길게 메아리치며 한참을 바람처럼 맴돌다 사라졌습니다.
"엄마! 어디 있어!"
다시 소리쳐보지만 바람에 나뭇잎만 살랑거립니다. 잠시 귀를 쫑긋거리던 아기 사슴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으앙!
눈물은 보송송한 솜털 사이사이로 미끄러집니다. 한참을 울고 난 아기 사슴은 제 풀에 지쳐 코를 훌쩍거립니다. 그 때였습니다.
샤라락.
등 뒤에서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엄마?"
아기 사슴은 노란 씀바귀 풀숲으로 폴짝 뛰었습니다. 놀란 실잠자리 두어 마리가 화라락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스르륵스르륵. 잠자리의 까만 꼬리들이 아찔한 아지랑이가 되어 하늘로 꼬물꼬물 올라갑니다. 아기 사슴은 콧잔등에 엉겨 붙은 거미줄을 떼어내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댑니다.
휘리릭.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엄마야?"
아기 사슴은 하얀 개망초 풀숲으로 폴짝 뛰었습니다. 놀란 무당벌레 한 마리가 화라락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릅니다.
비이잉비이잉. 무당벌레의 까만 점 일곱 개가 햇살에 미끄러지며 허공에 흩어집니다. 풀잎이 아기 사슴 얼굴을 쿡쿡 찌릅니다. 아기 사슴은 몇 걸음 비틀거리다 픽 주저앉아버렸습니다.
"리초야!"
멀리서 아기 사슴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얀 조팝나무 덤불이 흔들거립니다. 꽃 한 무더기가 하얀 구름이 되어 뛰쳐나옵니다. 꽃사슴 뒤로 노란 씀바귀와 하얀 개망초가 휙휙 바람처럼 지나갑니다.
"이런. 울지 마라. 우리 아가."
조팝나무를 헤치고 달려온 엄마 사슴은 아기 사슴을 껴안았습니다. 리초는 엄마를 만나자 다시 서럽게 울기 시작합니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엄마가 없어진 줄 알았잖아."
"미안 미안, 우리 리초. 이제 눈물은 뚝 그치렴. 하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냄새를 맡아보라고 얘길 했는데."
엄마 사슴이 리초 머리를 핥아주었습니다.
"꽃 향기가 너무 진해서 엄마 냄새는 안 난단 말야."
아기 사슴은 볼 멘 소리로 대답합니다.
엄마 사슴 몸에서는 정말로 꽃향기가 아찔하게 솟아올랐습니다. 조팝나무 꽃냄새가 엄마 사슴의 흰 꽃무늬에서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기 사슴은 엄마 젖꼭지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습니다.
"툭 하면 울고. 창피해 죽겠어."
엄마 사슴이 토라지듯 벌떡 일어났습니다. 리초는 잽싸게 엄마를 따라 붙었습니다.
"어디 가는 거 아냐."
"그래도."
리초가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합니다.
"엄마. 젖!"
리초는 엄마 가랑이 사이로 몸을 들이 밀어 볼그스레한 젖꼭지 하나를 톡 물었습니다.
"안 돼!"
엄마 사슴은 껑충 한 걸음 앞으로 뛰었습니다. 그 바람에 하얀 젖이 쭈르르 공중에 흩어졌습니다. 알갱이들이 리초의 콧잔등으로 투두둑 떨어집니다. 몇 개의 알갱이는 콧등에 튕겨 다시 더 작은 알갱이로 부서졌습니다. 리초는 콧잔등에 묻어 있는 젖을 호르륵 소리내며 핥아먹었습니다.
"아, 맛있다."
리초는 땅바닥에 떨어진 젖까지 샅샅이 핥아먹었습니다.
"너도 젖을 떼야지. 언제까지 엄마만 따라 다닐 거니? 따오를 보렴."
"피. 할 말 없으면 맨날 따오 얘기야. 따오는 남자잖아. 게다가 생일도 빠르고."
리초는 샐쭉 토라졌습니다.
"몇 번이나 얘기했니? 따오는 너보다 겨우 하루 먼저 태어났다고. 어쨌든 따오는 풀을 잘 먹고 있잖아."
"그거야 엄마가 따오한테 젖을 안 주니까 그렇지. 그리고 따오는 친 엄마도 아니니까 엄마한테 젖을 달라 하기도 미안할 거구."
"뭐라고?"
엄마 사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따오가 그러든? 친엄마가 아니라 젖을 먹지 못하겠다고?"
엄마 사슴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습니다.
"따오 녀석, 보기보다 생각이 깊구나. 나는 그저 어린 게 용케 풀을 잘 먹는다 생각했는데……."
엄마 사슴은 말없이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구름 사이로 언뜻 따오 엄마가 나타난 것도 같습니다.
'참 좋은 친구였는데…….'
갑자기 생각난 따오 엄마 때문에 엄마 사슴은 울컥 목이 매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 행여 입 밖에 내지 마라. 이 엄마가 일부러 젖을 안 주는 줄 알겠다."
리초는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따오가 아무한테도 그 말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아니, 따오가 그렇게 말했다는 게 아니라, 따오 마음이 그렇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 본 거야."
리초는 얼른 둘러 대었습니다.
"네가 생각한 거라구?"
엄마 사슴은 리초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저, 정말이야. 내가 따오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 그렇게 생각해 본 거라니까."
리초 얼굴이 저녁 노을처럼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리초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여 킁킁거리며 풀 냄새를 맡는 척 했습니다.
"우리 공주님도 다 컸는 걸? 친구 생각도 할 줄 알고."
엄마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칭찬을 해 줍니다. 리초도 엄마의 환한 얼굴을 보며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엄마, 정말 풀이 맛있어?"
리초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이 툭 튀어 나와 버렸습니다. 아차,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땅에 떨어진 엄마젖처럼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엄마가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습니다.
"드디어 너도 풀이 먹고 싶은 게로구나."
리초는 당황하여 눈을 뙤룩뙤룩 굴렸습니다.
"뭐,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개망초는 맛이 어때? 먹을 만 해?"
리초는 뜬금없이 한번 먹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따오도 잘 먹는데 못 먹을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따오 말처럼 눈 딱 감고 한 번만 잘 먹으면 그 다음부터는 젖처럼 술술 넘어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엄마 사슴은 따오에게 처음 그랬던 것처럼 개망초 풀잎을 잘근잘근 씹어 리초 입에 넣어 주었습니다.
"눈을 감고 꼭꼭 씹어 보렴. 그러면 엄마 젖처럼 고소한 맛이 날 거야."
리초는 얼굴을 찡그리며 엄마가 건네주는 개망초를 입으로 받았습니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이게 뭐 그리 맛있담.' 리초는 입을 실룩거렸습니다. 리초는 한숨을 삼키며 억지로 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한참을 씹고 있으려니 조금씩 고소한 맛이 풍겨 나옵니다. 리초는 개망초 잎을 꿀꺽 삼켰습니다. 상큼한 향이 은은하게 온 몸에 퍼져 내려갑니다. 리초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엄마, 또 없어?"
"없긴……. 나는 네가 따오보다 더 잘 먹을 줄 알았어."
"정말?"
"아무렴, 따오는 못 먹겠다며 얼굴을 찡그리며 몇 번이나 뱉어 냈는 걸?"
리초 뺨이 다시 볼그래졌습니다.
4월의 봄 햇살이 두 꽃사슴을 따사롭게 감싸 안았습니다. 풀꽃들은 익을 대로 익은 봄 속에서 한창 멋을 내고 있습니다. 나무 이파리들은 점점 짙푸른 녹색으로 싱그러워졌습니다. 하얀 별꽃과 노란 애기똥풀꽃이 화사한 웃음으로 꽃망울을 터트렸습니다.

"아참, 따오는 어딨니?"
엄마 사슴이 두리번거리며 물었습니다.
"어, 같이 있었는데?"
리초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숨바꼭질을 하며 같이 놀았는데 따오가 보이질 않습니다.
"따오야. 그만 나와."
리초는 수풀 주위를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며 따오를 불렀습니다.
"어디에 숨었지?"
리초는 앞발로 머리를 긁적거렸습니다. 따오가 이번에는 정말로 꼭꼭 숨었나 봅니다. 여깄다, 하며 제 풀에 지쳐 불쑥 나타났을 따오거든요.
"혼자서는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줬는데, 어디 갔을까? 여우 무서운 줄 모르고……."
엄마 사슴은 코를 높이 세우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마주 보고 섰습니다.  킁킁. 리초도 엄마처럼 가만히 서서 냄새를 맡아 봅니다. 여우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털이 오소소 일어섰습니다.
"토끼풀밭에 있는 거 같구나. 어서 가 보자."
엄마 사슴이 겅중겅중 뛰기 시작합니다. 리초도 엄마를 놓칠세라 강종강종 뛰었습니다.
"엄마 엉덩이를 잘 보고 따라 와야 한다. 저번처럼 놓치지 말고."
"히히. 근데 엄마 엉덩이에 있는 하얀 동그라미가 뛸 때마다 하하하 하고 웃는 거 같아."
"엄마 엉덩이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다. 그리고 흰 동그라미는 네 엉덩이에도 꽃무늬처럼 철썩 붙어 있는 걸?"
"정말?"
리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엉덩이에 하얀 동그라미라니. 리초는 확인해 볼 량으로 엉덩이 쪽으로 폴짝 몸을 돌려 뛰었지만 엉덩이도 폴짝 그만큼 돌아갔습니다. 리초는 엉덩이를 바싹 쳐들었습니다. 뭉툭한 꼬리 아래로 하얀 엉덩이가 얼핏 보일 듯 말 듯 합니다. 사슴은 뛸 때 엉덩이를 높이 들어 흰 동그라미를 다른 사슴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길을 잃지 않고 따라갈 수 있거든요. 엄마 사슴이 조팝나무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조팝나무는 촘촘히 서로 엮여 있어 좀처럼 빠져나가기가 힘들지만 통과하면 토끼풀밭으로 가는 빠른 지름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흰 동그라미 두 개가 조팝나무 덤불을 뚫고 달려갑니다. 하얀 조팝나무 꽃잎들이 바람에 흩어집니다. 조팝나무를 지나 울창한 참나무 숲에 이르자 엄마 사슴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신갈나무 위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도토리를 안은 채 빼꼼히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엄마 사슴은 눈을 크게 뜨고 흙을 살폈습니다. 비가 내려 촉촉해진 땅에는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습니다.
"앗! 여우 발자국이다."
엄마 사슴이 소리쳤습니다. 리초는 겁이 나서 얼른 엄마 옆에 바짝 붙었습니다. 바로 뒤에서 여우가 곧 덮칠 것만 같았습니다.
"따오를 따라간 게 분명해."
엄마 사슴이 가리키는 곳에 따오 발자국이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일정한 간격으로 여우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엄마 사슴은 다시 고개를 들어 냄새를 맡았습니다.
"빨리 가야겠다."
엄마 사슴은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두 사슴은 엉덩이를 하늘 높이 올렸습니다. 바람을 휙휙 가르며 겅중겅중, 강종강종 뛰었습니다. 엄마 사슴 코에서 뜨거운 김이 푹푹 나왔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습니다. 리초는 어질어질해져 곧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숨이 턱 바로 아래까지 닿았습니다. 숨바꼭질을 한다며 토끼풀밭까지 가다니. 따오가 얄미웠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앞이 탁 트이며 시원한 풀밭이 나타났습니다.
"와, 토끼풀밭이다!"
리초는 코를 벌름거려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습니다.
"여기에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엄마 사슴은 따오를 찾기 위해 널따란 토끼풀밭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리초는 눈을 가늘게 뜨고 토끼풀밭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하얀 토끼풀꽃들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군데군데 강아지풀과 흰 별꽃풀이 하품을 하며 서 있고, 연분홍 토끼풀꽃도 간간이 섞여 있습니다. 리초는 살며시 꽃 냄새를 맡았습니다.
따오는 숨바꼭질을 하다 지치면 하얀 토끼풀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리초에게 걸어주곤 했습니다. 목걸이를 많이 만드는 날이면 가끔씩 토끼 아저씨한테도 선물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먹을 거 가지고 장난친다고 야단맞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면 따오는 애써 만든 목걸이를 낼름 먹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그 때문에 풀을 잘 먹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안녕? 리초."
불쑥, 갈색 토끼 한 마리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리초는 깜짝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앵초 아주머니였군요. 깜짝 놀랐잖아요."
"미안 미안, 놀라게 하려고 했던 건 아냐."
토끼는 옆으로 길게 나 있는 수염을 쓰다듬었습니다. 리초는 앵초 아주머니와 눈을 맞추기 위해 낮게 엎드렸습니다.
"고마워. 내 이름을 기억해 줘서."
토끼가 긴 귀를 살랑살랑 흔들었습니다.
"뭘요. 토끼풀밭 대장님 이름을 잊어버리면 되나요?"
"호호, 리초가 이렇게 예의 바른 숙녀인 줄 몰랐는 걸?"
대장 토끼는 사뭇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엄마가 늘 예의 바른 사슴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리초는 따오를 열심히 찾고 있는 엄마 사슴을 가리켰습니다. 앵초 아주머니는 이곳 토끼풀밭을 지키고 관리하는 으뜸 토끼입니다. 토끼풀밭에는 앵초네 가족과 친척 토끼 가족이 함께 살고 있지요. 봄이 막 기지개를 켜던 3월 초만 해도 앵초네 가족과 친척 토끼 두 가족 합쳐서 모두 세 가족뿐이었습니다. 그런데 4월이 되자 앵초네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새끼를 낳았습니다. 조금 더 지나서 앵초 아주머니는 또 한 번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것도 한꺼번에 네 마리씩이나요. 그리고 얼마 전에는 친척 토끼들도 줄줄이 자식을 낳았습니다. 토끼들은 늘어난 식구 때문에 더 많은 곳에 굴을 파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토끼풀밭 한 가운데까지 토끼굴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제는 조심조심 아래를 살펴보며 다녀야 한답니다. 잘못하면 토끼굴에 발이 빠지기도 하거든요. 하루는 따오랑 뒹굴며 놀다가 토끼굴을 무너뜨려 크게 혼난 적이 있었습니다. 리초와 따오는 앵초에게 앞발을 싹싹 빌었습니다. 결국 엄마 사슴이 와서 잘못을 빌고서야 앵초 아주머니한테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아참, 따오."
리초는 따오 생각이 났습니다.
"혹시 따오 못 봤나요?"
"따오? 좀 전에 다녀갔는데. 가만 있자. 내사랑 얄라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얄라는 얼마 전 앵초 아주머니랑 결혼한 토끼 아저씨입니다.
"따오를 찾는다고?"
앵초 아주머니가 채 내려가기도 전에 얄라 아저씨가 쑤욱 나타났습니다. 얄라 아저씨는 이슬방울이 아직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토끼풀을 삼킬 듯 말 듯 입 안에서 오물거렸습니다. 살짝 웃는 아저씨가 토끼풀과 닮았습니다. 앵초 아주머니가 호들갑스럽게 얄라 뺨에 뽀뽀를 합니다.
"오, 내사랑 얄라."
"오, 귀여운 앵초."
얄라 아저씨와 앵초 아주머니는 서로를 껴안고는 얼굴을 마구 비벼 대었습니다. 아기 사슴이 보고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은가 봅니다. 하지만 리초는 행복하게 사는 토끼 부부가 부러웠습니다.
'왜 아빠는 우리랑 같이 살려고 하지 않을까?'
리초는 아빠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습니다. 하지만 깜깜한 그믐밤처럼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아빠 사슴은 엄마 사슴이 새끼를 낳으면 그 때부터 떨어져 혼자 지낸답니다. 그건 어느 아빠 사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리초는 숨바꼭질을 하다 길을 잃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여우골 근처에서였습니다. 리초는 여우가 곧 덮칠 것 같아 무서움에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 때 처음 보는 사슴 아저씨가 나타났습니다.
'네가 리초로구나.'
리초는 너무 무서워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습니다. 사슴아저씨는 리초 목덜미를 부드럽게 핥아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상하게 무서움이 사라졌습니다. 아저씨는 안전하게 길을 인도해 주었습니다. 집 가까이에 오자 리초는 너무 기쁜 나머지 고맙다는 인사도 잊고 집으로 뛰어들고 말았습니다. 엄마 사슴은 아마도 아빠 사슴일 거라고 했습니다. 엄마 말이 맞다면 아빠와의 기억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리초는 토끼 아저씨에게 정겹게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내사랑 얄라 아저씨."
리초는 자기도 모르게 앵초 아주머니처럼 '내사랑 얄라'라고 불렀습니다.
"오, 토끼풀밭에 오는 제일 예쁜 숙녀 아가씨로군."
얄라 아저씨는 오물거리던 풀을 꿀꺽 삼켰습니다. 숙녀 아가씨라니, 리초는 기분이 좋아 배시시 웃었습니다. '너는 언제쯤 숙녀가 될래?' 이건 따오가 늘 놀리던 말이거든요.
"따오는 좀 전에 산 아래로 내려갔어."
얄라 아저씨가 앞발을 들어 아래쪽을 가리켰습니다.
"산 아래라구요?"
리초는 벌떡 일어나 비탈길 아래를 내려보았습니다. 혼자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입니다. 그 곳에는 옹달샘이 있습니다. 동물들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곳이죠. 하지만 엄마 없이 그 곳에 간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옹달샘 주위에는 항상 큰 동물들이 먹잇감을 노리고 있지요. 그런데 따오가 엄마도 없이 혼자 옹달샘 쪽으로 가다니요.
"옹달샘 근처에서 나무껍질을 찾고 있을 게야."
"나무껍질이라구요?"
"그걸 먹으면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얄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따오 녀석. 어른 행세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났더라구."
'이런 멍텅구리.'
여우가 뒤쫓는 것도 모르고 어른처럼 보이려고 하는 따오가 리초에겐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리초는 급하게 인사를 하고는 엄마가 있는 곳으로 뛰어 갔습니다.
"이런, 뭐가 그리 바쁜지. 하여튼 맹랑한 녀석이야."
얄라 아저씨가 히죽 웃으며 말했습니다.
"호호. 리초 녀석. 꽉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요."
앵초 아주머니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게 말이요. 하지만 엊그제 태어난 우리 새끼들만 하겠소?"
"아무렴요. 리초보다야 훨씬 귀엽지요."
토끼 두 마리는 꼭 닮은 두 귀를 나란히 세운 채 토끼굴 속으로 쏘옥 들어갔습니다.
#동화 #아동문학 #환경 #생태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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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아동문학가, 독서운동가> 좋은 글을 통해 이 세상을 좀더 따뜻하게 만드는 데 동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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