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영 평군 사무처장아프간 재파병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환영 씨는 육사를 졸업한 장교출신이다.
김도균
"2004년 6월에 일어난 김선일씨 사건이 반전평화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날 출근길에 라디오 뉴스에서 김씨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멍해졌다. 지금도 그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어떻게 운전을 해서 사무실까지 갔는지도 모르겠다."반전평화운동 단체인 '평화재향군인회'(아래 평군) 김환영(40) 사무처장은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에 대해 이렇게 입을 열었다. 김씨는 평화운동가들 중에서 좀 별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5년간 장교로 복무했던 것. 무엇이 직업군인을 꿈꾸며 군문에 들어섰던 청년 장교를 평화운동가로 변화시켰는지 궁금했다.
"생도 시절에는 멋지게 군대생활을 한번 해보리라 생각했다. 포천 706 특공연대에서 소대장 생활을 시작했는데, 내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다. 병사들에게 심부름 시키지 않고 내 식기는 내가 닦고, 같이 뛰고, 함께 호흡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그러다가 한 10개월 정도 되었을 때 결정적으로 어떤 벽 같은 걸 느끼게 됐다. 나는 그때까지 병사들하고 나 사이엔 어떤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만나면 서로 친구 사이지만, 각자 맡은 바 역할이 있으니 소대장은 소대장대로, 병사들은 병사들대로 임무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게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구나 하고 느꼈다. '결국 당신은 장교 아니냐', 이렇게 나오는데 정말 상처 받았다. 그때 아, 이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구나라고 생각했다."
김씨가 생도 시절 꿈꿨던 군대는 거대한 벽이 되어 그 앞에 서 있었다. 다시 한 번 군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든 것은 그가 전방소대장 생활을 마치고 3사관학교 구대장을 할 때였다고 했다.
"내가 교육을 맡았던 사람들은 군의관으로 임관할 의사들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정말 괜찮은 사람들이었지만 집단이 되면 이렇게 허술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목숨을 바쳐서 이 사회를 지키겠다고 군인의 길을 선택했는데, 이 사회에서 기득권을 쥐고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 사람들이 자기 이익 앞에서는 허술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내가 정말 목숨을 바쳐서 싸워야 할 사회인가라는 의문이 생겼다."
김선일의 죽음 "정부가 국민을 그 지경에 빠트리다니... 이건 아닌데"의무복무 기간을 채우고 1998년 3월 전역을 했다. 그리고 바로 아들이 태어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별 헛생각을 다했구나 하고 생각할 때도 많지만 그땐 이 녀석이 군대 갈 때 여전히 그런 사회가 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김씨는 자동차 영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이 일이 좋았다고 말했다.
"자동차 영업이란 게 사람을 많이 만나야 되는 일이다.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정말 현실인지, 환상인지 가서 더듬어 보고 만져보고 확인하고 싶었는데 정말 그랬다. 어찌 보면 이 일을 했기 때문에 지금 시민단체 일도 할 수 있는 것 같다."
김씨는 2004년 6월 23일을 자신의 삶이 근본적으로 바뀐 날로 기억한다. 그는 김선일씨 피살 사건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 당시의 내 분노는 어쩌면 우파의 생각일 가능성이 많다. 김선일씨가 죽기 전 릭 버거라는 미국인이 참수되는 것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는데, 김씨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김씨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영상을 보고 그래도 한국 정부가 대안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방부도 있고, 국정원도 있고, 외무부도 있으니 이미 김씨 소재 파악도 되어 있을 거고 구출작전 준비도 다 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저렇게 정부가 당당하게 '일체의 타협도 없다, 파병하겠다'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김씨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정말 참담했다."
그날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그는 인터넷에 '김선일 피살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 대각성 모임'이라는 긴 이름의 카페를 개설했다.
"그때는 정말 원망스러웠다. 나는 국군의 활동이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라크 파병이라는 것이 김선일씨를 죽게 만든 것이다. 파병을 끝까지 한다고 하는 군사력 사용에 대한 결심이, 우리 국민 한 사람이 비참한 죽음을 당하도록 방치한 것이다. 어떻게 정부가 국민을 그런 지경에까지 빠트릴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