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옛 장안)의 대표적 역사유적 중 하나인 비림박물관. 이곳에는 천여 개의 비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비석들이 수풀처럼 전시되어 있다 하여 비림(碑林)이란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다.
김종성
당태종은 신라 사신의 방문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역이용했다. 이를 빌미로 신라를 압박하여 도리어 신라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내는 쪽으로 당태종의 머리가 급속히 회전한 것이다.
<삼국사기> 권5 '선덕여왕 본기'에 따르면, 이때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세 가지 카드를 제시했다. 첫째는 소규모의 당나라 군대가 요동을 치는 방안이고, 둘째는 신라 군대가 당나라 군대 행세를 해서 고구려·백제에게 겁을 주는 방안이며, 셋째는 당나라 황족이 임시로 신라국왕을 맡는 한편 당나라 군대가 신라를 보호해주다가 신라가 안정되면 신라인에게 국왕 자리를 돌려주는 방안이었다. 이중에서 당태종의 진의가 세 번째 카드에 있었다는 점은 12월 7일자 기사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사대는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당태종이 자기 의도대로 선덕여왕이 하야를 해주리라고 기대했을 리는 없다. 그가 진정으로 노린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당태종의 진정한 목적은 선덕여왕의 권위를 흔들어 신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파병을 요청하는 신라를 상대로 도리어 군사적 지원을 얻어내려 했으니, 당태종이야말로 진정한 '장사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한 2단계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당태종은 왜 '여왕 무능론'을 설파했나먼저, 제1단계는 '논리적 준비'였다. 그가 선덕여왕을 흔들기 위해 준비한 정치적 논리는 이른 바 '여왕 무능론'이었다. 643년에 찾아온 신라 사신과의 대화에서 당태종은 세 번째 카드를 강조하면서 "너희 나라는 여인을 주군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웃나라들로부터 경멸을 받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여자는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선덕여왕을 압박한 것이다.
신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성이 왕위에 올랐지만, 그렇다고 여성의 사회적 리더십이 부정된 것도 아니었다. 신라의 상황은 일본과 매우 유사했다. 두 나라 모두 여신과 여성 사제의 존재로 인해 여성의 리더십이 확립되어 있었기에 '원칙적으로는 남자가 왕위에 올라야 하지만, 급할 때에는 여자도 왕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공감대가 있었기에 선덕여왕에 앞서 일본에서 이미 593년에 추고 여왕(소위 '천황')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고, 또 그런 공감대가 있었기에 632년에 덕만공주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의 윤리와 이념을 만들어내는 귀족들이 합의 절차를 거쳐 여왕을 추대했다는 사실은 신라사회가 여성에 대해 그만큼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신라 내부적으로는 여왕 무능론이 사회적 파워를 갖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왕 무능론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최강인 당나라의 황제가 직접 그런 논리를 설파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물론 당태종 이전에도 안홍이라는 신라 승려가 <동도성립기>란 책에서 "신라 제27대에는 여왕이 주군이 되니, 비록 도(道)는 있을지라도 권위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구한(九韓, 여기서는 '이웃나라'의 의미)의 침략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안홍의 예언은 그저 예언에 그쳤을 뿐, 정치논리로 발전하거나 사회적 파급력을 갖지는 못했다. 당태종처럼 막강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정치논리로 발전시키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당태종의 여왕 무능론에 놀아난 자장법사위와 같은 제1단계 '논리적 준비'에 이어, 제2단계에서 당태종은 '신라인을 이용한 논리의 확산'에 들어갔다. <삼국유사> 제3권 '황룡사 구층탑'에 나오는 자장법사(590~658년)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자장법사는 선덕여왕 5년(636)에 중국 유학을 떠났다가 7년 만인 여왕 12년(643)에 귀국한 거물급 지도층 인사였다. 당태종이 신라 사신에게 여왕 무능론을 설파한 바로 그 해에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장법사가 귀국 직전에 누구를 만났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는 귀국 직전에 당태종을 만나 불경·불상·가사·폐백 등을 선물로 받았다. 자장이 당태종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귀한 것이었다.
요즘 같으면 대형 사찰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옛날에는 웬만한 '빽'이 없이는 구하기 힘든 '진품명품'들이었다. 조선 세조(재위 1455~1468년)가 불경 등을 선물하는 방식으로 일본 막부의 환심을 사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측의 군사적 도발을 방지한 사례는 과거 동아시아에서 불경이 얼마나 귀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당태종이 자장법사에게 그처럼 극진한 대접을 베푼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신라의 지도층 인사인 자장법사를 이용해서 여왕 무능론을 신라에 전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자장법사 자신은 그럴 마음이 없었겠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당태종의 의도에 휘말려들고 만 것이다. 당태종의 의도가 성공했다는 점은, 당태종을 만난 뒤에 신라로 돌아간 자장법사가 여왕 무능론의 확산에 기여한 사실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삼국유사>에는 귀국 직후의 자장법사가 당태종의 논리를 이용하여 황룡사 구층탑 건립을 추진하는 장면이 나온다. 경주로 돌아와 선덕여왕을 예방한 그는 '나라를 구하려면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선덕여왕을 압박하여 재정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당태종의 여왕 무능론을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자장법사가 귀국 전에 만났다는 어떤 신(神)과의 대화 장면이 나온다. 그 신과의 대화 내용이 선덕여왕을 압박하는 무기가 된 것이다. 그럼, 자장법사가 만났다는 그 '중국 신(神)'은 그에게 대체 무슨 말을 했을까?
자장법사는 그 신이 자기에게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덕은 있지만 권위가 없어서 이웃나라들이 도모하는 것"이라 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신이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들이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 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왕을 은근히 협박하는 이 이야기 덕분에 그는 정부로부터 건립 자금을 받아 공사에 착공할 수 있었다.
자장법사가 귀국 전에 만났다는 신(神). 그가 실제로 신을 만났는지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귀국 직전에 당태종을 만났으며 당태종이 그 신과 똑같은 말을 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가 전달한 신의 발언이 당태종의 발언과 똑같으며 그것이 결국 신라사회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장법사의 말을 들은 선덕여왕이 적국인 백제에서 기술자까지 초빙해 구층탑을 짓도록 한 사실을 보면, 자장법사가 확산시킨 여왕 무능론이 얼마나 큰 파급력을 발휘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뒤에 비담이 여왕 무능론을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자장법사가 확산시킨 당태종의 논리가 힘을 발휘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자장법사가 의도적으로 당나라를 위해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저 당태종의 논리를 이용하여 대규모 종교사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그는 '결과적으로' 당태종의 의도에 휘말려든 것이다. 자장법사 같은 지도층 인사가 힘을 보태지 않았다면, 당태종의 여왕 무능론이 신라 사회에 그처럼 쉽게 확산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선덕여왕의 무모한 파병, 당태종의 승리?서기 643년에 위와 같은 2단계를 거쳐 신라에 확산된 당태종의 여왕 무능론이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은, 2년 뒤인 645년에 신라가 국가적 손실을 무릅쓰고 당나라에 대한 군사원조를 단행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과 때를 맞추어 선덕여왕이 3만 명의 군사를 동원해 고구려 협공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신라 입장에서 볼 때에, 645년의 군사적 지원은 상당히 '무모한 파병'이었다. 깊은 숙고 없이 이루어진 결정이었던 것이다. 3만 명의 군대가 당나라를 도우러 간 사이에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여 일곱 개의 성을 빼앗은 사실에서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백제 방어에 사용해야 할 군대를 당나라를 위해 사용했다는 사실은 선덕여왕이 판단의 균형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는 그만큼 여왕 무능론을 앞세운 당태종의 선덕여왕 흔들기가 성공을 거두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여왕 무능론을 내세운 당태종의 진정한 의도가 신라 여왕을 하야시키는 데에 있지 않고, 여왕을 곤경에 빠뜨려 신라 군대를 자기 군대처럼 이용하려는 데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당나라가 신라를 위성국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한 방법 중 하나는 정통성 시비를 통해 신라 국왕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당나라가 이 과정에서 '친당적(親唐的)'인 신라 지도층 인사를 활용하여 자신의 논리를 신라에 확산시켰다는 점이다.
마치 야바위꾼 같은 당태종의 계략에 휘말려 신라 여왕은 결국 '무모한 파병'을 결심했고, 그로 인해 젊은이들의 생명과 백성들의 혈세를 소모했을 뿐만 아니라, 백제에게 일곱 개의 성을 빼앗기는 수모까지 겪고 말았다. 이는 개인이든 국가든 간에 확고한 자기 주관을 갖지 못하고 남에게 휘둘릴 경우에는 결국 불행을 만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실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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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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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뚜껑 열리게 한' 여왕무능론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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