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떨어져 혼자서라도 목포로 내려가겠다던 아내
송성영
"나 혼자라도 가겠어" 아내의 선언
그렇게 우리는 드라마 속에서의 이혼을 앞둔 부부처럼 싸늘하게 등을 돌렸습니다. 그 일에 매달리기 위해 혼자서라도 떠나겠다는 아내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아내가 하고 싶어 했던 그 일이 도대체 뭐냐구요? 아내가 어렵게 펜션을 포기할 무렵 아내의 구원투수, 김 선생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아내가 하고 싶었던 그 일, 천연염색을 권장한 사람은 바로 천연염색가 김 선생이었습니다.
우리 식구와 10년 넘게 인연을 맺어 왔던 김 선생은 참으로 귀하고도 별난 사람입니다. 10년 전 쥐새끼들이 우당탕거리는 다 쓰러져가는 우리 집 사랑방에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큰 대자로 벌렁 누워 여장부다운 면모로 걀걀걀 웃어 제쳤습니다.
"야 편하다! 난 이런 집이 좋아. 연기 냄새 풀풀 나는 이런 집이 참 좋아.""천청에 쥐새끼들이 우글 거린다니께유""쥐새끼들이 있으면 어떼예, 편하면 그만이지."우리 부부는 그런 거침없고도 소탈한 선생이 좋았고 돈과 명예 따위와 상관없이 천연염색 일에 푹 빠져 살아가는 선생의 장인정신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선생 또한 우리 가족의 소박한 생활 방식을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선생과 두 번째 만남에서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가 살아온 얘기들을 속속들이 털어 놓을 수 있었을 정도로 가깝게 지내왔습니다.
김 선생은 고향에서 평생을 천연염색에 매달려 살아왔습니다. 농업기술연구센터를 직장으로 삼고 있었지만 다 쓰러져 가는 산동네 오두막집에 살았습니다. 오래 전 어느 해 겨울, 우리 네 식구가 하룻밤 그 산동네 신세를 진 적이 있었습니다. 연탄불을 지피는 그 작은 방안은 온통 염색 천으로 그득해 발조차 뻗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비를 털어 염색 일에 매달려 살았기에 공무원 생활 30 년 동안 손바닥만한 서민 아파트 한 칸 장만하지 못하고 오히려 은행 빚을 지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그 해 겨울, 우리식구가 선생의 산동네를 찾아갔던 며칠 전, 선생은 천연염색에 매진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상까지 받았음에도 그 사실을 전혀 입밖에도 내지 않았습니다.(얼마 전 이 기사를 쓰기 위해 인터넷에 기재된 신문기사를 통해 알게 된 것인데 선생은 '1970년대 중반부터 전통염색을 하는 촌로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채록하고 야생화 등 국내 자생식물 2백여 종의 발색실험을 거쳐 90여 종의 염료자원을 개발한 공을 인정받아 대통령상을 받았다'- 2002년 12월 17일자 중앙일보 기사 일부)
우리식구는 그동안 선생의 업적조차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그런 사실조차 전혀 내색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만큼 선생은 세상일에 초탈하여 오로지 천연염색에만 매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를 이수자로 삼겠다'는 천연염색 대가의 제안 거대한 화폭에 천연염색 그림을 그리고 있는(유럽과 미국에서의 전시를 통해 이미 호평을 받았음) 선생은 목포에 전시실 겸 작업실로 쓰기 위한 너른 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내가 말했지요. 이사 갈 곳을 정하는데 첫 번째와 마지막을 함께 정하자고. 긴말 할 것 없이 우리 같이 삽시다. 내가 해정씨와 할일도 있고." 천연염색 기능전수자로서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선생은 어떤 일이든 겁없이 달려들어 일머리에 남다른 재주를 보이고 있는 아내를 이수자로 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평소 존경하던 선생 밑에서 천연염색을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일생일대의 기회라 여겼습니다.
그 많은 제자들을 제쳐두고 아내를 선택한 것에 대해 한량없이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내심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일이든 일에 매진하게 되면 물불 안 가리고 열정적으로 달려들지만 그 일이 맞지 않다 싶으면 그만큼 쉽게 포기해 버리는 아내의 좌충우돌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 사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유?'"그동안 시골에서 가진 것 없이 살아온 것을 보면 충분히 해낼 수 있어예. 못 할게 뭐가 있어예. 해정씨처럼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문제는 당장 목포 주변에 기능 전수관을 마련해야 했고 우리 식구가 그 전수관에서 생활해야만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내는 당장이라도 짐을 싸들고 목포로 내려갈 기세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공주에서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한창 문화사업을 벌여나갈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공주에서 멀고 먼 목포로 내려가게 되면 당장 그 일에서 손을 떼야 했고 밥벌이 방송일이며 농사일도 접어야 했습니다.
아내와 목포로 내려가니 못 가니 티격태격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김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해정씨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도록 그냥 놔줍시다. 속에 있는 에너지를 맘껏 발산하도록 도와줍시다." "그러긴 한디유......."나는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내 문제도 내 문제였지만 두 사람의 불같은 성품이 맞부딪히게 되면 큰 불화가 생길 것이라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불안감을 털어놓자 화통한 성격의 선생답게 그렇게 되면 그렇게 대는 대로 가자고 했습니다. 김 선생의 넉넉한 배려에 힘입어 아내의 속마음을 다시금 헤아려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