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세계화의 급격한 진행을 언급하며 21세기는 드디어 하나의 지구촌이 완성될 시대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지구는 아직도 넓고 인간의 삶의 방식은 여전히 다양하다. 가끔 TV에서는 지금까지도 문명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에 살고 있는 말 그대로 '토인'들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릴 때 역사 교과서에서나 읽고 상상하던 원시인들의 삶의 모습이 거기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당장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만 이동하면 수천년 전의 인간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내가 자주 보는 또다른 성격의 TV 프로그램은 현재 KBS에서 방영중인 <동행>과 같은 민생 다큐멘터리다. 거기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온갖 고된 노동을 다 하지만 언제나 가난하고 언제나 고달픈 지금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슬프고 답답하고 가슴 아프다가 결국엔 어딘가 혹은 누군가에 대해 화가 나곤 한다.
어느날은 문득 유럽의 복지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이같은 한국 다큐멘터리를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혹시 그들은 우리 서민들의 삶을 보며 내가 TV에서 현시대의 토인을 볼 때 가졌던 신기하기까지 한 그 아스라함을 느끼는 게 아닐까?
냉혹한 시장논리, 무너지는 삶의 존엄
내가 토인들의 원시적 삶에 놀랐듯이 아마 그들은 한국인들의 '시장적' 삶에 놀랄 듯싶다. 화면을 통해 시장의 약자는 낙오될 수밖에 없는 냉혹한 한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선조도 저렇게 살았다는 사실에 새삼 경악할 것 같다. 돈이 없으면 자식들 교육도 제대로 못 시키고, 심하게 아플지라도 병원 가길 두려워하며, 살 집 걱정에 늘 불안해하는 한국 서민들의 현재 모습이 그들 눈에는 그저 아득한 옛날 일로 비칠 것이다.
그들 중 동정심 많은 이들은 필경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데도 어떻게 그리 가난할 수밖에 없는가! 저렇게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사는데도 왜 저들은 떳떳하지 못하고 언제나 누군가에게 굽실거리고 비굴해야만 하는가! 분명 저들의 잘못이 아니지 않는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것이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민주주의에 의해 보장되는 자유는 오직 시장에서의 경제적 자유뿐이다. 단지 시민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빈곤과 소외 그리고 공포로부터의 자유, 즉 사회적 자유는 보장돼 있지 않다. 강하고 능력있는 자가 시장의 자유를 만끽하며 돈을 무한정 버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약하고 능력없는 자가 사회적 시민권을 앞세워 직장, 교육, 의료, 주거 등의 공공성을 요구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다. 고용 여부는 물론 임금 등의 고용조건도 노동시장에서 개별 근로(희망)자와 사용자 간의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육, 의료, 주거 등의 문제 역시 각각 해당 영역의 시장에서 각자가 '자율적으로' 해결할 것들이다.
"모든 문제는 시장에서 해결할지니..."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자유고 자율이라 하지만 시장에서의 그것은 사실 강자만이 즐길 수 있는 가치다. 약자는 그저 강자의 시혜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줄곧 신자유주의화의 길을 걷게 됨에 따라 이 강자의 자유는 지속적으로 강화돼왔다. 양극화의 심화와 비정규직 증대 등 그에 따른 사회경제적 폐해는 이미 사회통합의 위기를 우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OECD 국가 중 최악의 수준인 빈부격차는 날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으며, 고용의 질도 갈수록 악화되어 전체 노동자의 과반이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빈곤층의 확산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지 오래이나 사회안전망은 여전히 허술하기 짝이 없다. 예컨대, GDP 대비 사회적 공공지출은 OECD 평균이 21% 정도이나 한국은 6%를 조금 넘을 뿐이다.
결국 신자유주의화의 심화에 따라 사회경제적 약자가 양산됐으나 그들 대부분은 그저 방치돼왔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런 나라에서 희망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게다. 지난 십수년간 한국의 자살률 증가 속도는 OECD 국가 중 최고였으며, 2004년과 2005년은 자살율 1위의 국가로 기록됐다. 시장의 낙오자와 절망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시민들이 빈곤과 소외로 고통받으며, 절망하며, 죽어가고 있는 이 상황에서 그들을 돌봐야 마땅할 정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다 돼가지만 유가족들은 아직도 하염없이 울고만 있다. 지금도 많은 세입자들이 추운 거리로 쫓겨나고 있다. 내몰린 이들의 자살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없다. 정부는 그저 이러한 문제는 시장에서 해결될 것이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사회의 왜소하고 무책임한 정부일 뿐이다.
어둡고 음습한 시장의 한구석에 망연자실 쭈그려 앉아 있는 저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우리의 시민임을 잊었는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청춘의 이삼년을 군에서 보냈고, 환란 극복에 기여하겠다고 금가락지를 내놓았으며, 월드컵 때는 광화문을 붉게 물들인 이들이 바로 저 사람들 아니던가.
하다못해 소주 한잔을 마시고 담배 한대를 피워물 때마다 꼬박꼬박 세금을 내던 이들도 저들이다. 저들이 있기에 산업화에 성공했고 민주화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 귀한 이들을 사회적 시민권을 가진 당당한 시민으로 살게 하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대체 나라는 왜 있으며 정부는 무얼 하는 거냐고 울부짖는 저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정치구조 개혁,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시급한 과제
현 정부는 '우파 신자유주의' 정부이므로 시장에서의 정부 역할 증대를 더이상 기대하지 말라는 충고도 있다. 그것은 마치 다음 정부에서는 그러한 기대가 가능하다는 말로 들린다. 과연 그러한가? 정권이 바뀌면 분명 지금보다는 나아질 게다. (설마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크게 나아지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정부의 역할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역할은 집권정당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당들 중 집권 가능한 어느 정당이 사회경제적 약자 보호를 자신의 주 임무로 여기고 오직 그 일에 매진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선거제도와 정당구도 하에서는 유력 정당 어디에도 그러한 기대를 걸기 어렵다.
한국의 정당들은 군소정당에 불과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외에는 모두 기본적으로 정책이나 이념적 차이가 선명히 드러나지 않는 인물 혹은 지역 중심의 선거전문 정당들이다. 지역 기반이 튼튼하거나 대중적 인기가 상당한 인물을 확보하고 있으면 선거정치에서 충분히 유리하다고 믿는 이들 정당들은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시장조정기제 마련에 큰 노력을 기울일 인센티브가 애초부터 약하다.
결국 지금과 같은 정치구조로는 앞으로도 여전히 시장에서의 정부 역할이 최소한에 머무르리라는 것이다. 정부 역할의 획기적 강화는 정치개혁 이후에나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기존의 정당구도와 선거제도를 확 뜯어고쳐야 시장의 약자 보호를 자기 임무로 여기는 유력한 이념 정당이 출현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최태욱 기자는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입니다.
2009.12.23 14:19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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