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구산동고분군금관가야 멸망 이후에 조성된 고분군이다. 이 고분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금관가야 계통의 고분은 조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사적 제75호)
부경대학교박물관
가야멸망 이후 김해에 있던 왕족들은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형왕은 상등의 직위를 받고 금관국을 식읍으로 하사받은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구형왕 이후의 가야왕족들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남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서서히 김해와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무력이 한강유역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신주 군주로 임명된 사실이나, 김유신이 만노군, 즉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에서 출생하였다는 점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또한 <가락국기>에서도 멸망 이후 제사가 간혹 빠뜨려지기도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을 통해서도 실추된 김해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문무왕의 즉위로 인하여 변화하게 된다. 가야계 진골이자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에게서 태어난 문무왕은 김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종묘와 제사를 복원시킨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680년에 가야군에 금관소경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때부터 김해를 다시 중요시 여기기 시작한다.
신라에서 소경(小京)이란 특수한 행정구역으로서 오늘날의 광역시와 비교된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는 동남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보니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5군데의 도시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이는 문무왕~신문왕 때에 주로 설치되었는데, 북원소경(北原小京 : 지금의 원주), 중원경(中原小京 : 지금의 충주), 서원소경(西原小京 : 지금의 청주), 남원소경(南原小京 : 지금의 남원), 그리고 금관소경이 그것이다.
소경이 설치된 지역은 신라의 영토 중 과거의 변방이었거나 다른 나라의 주요 도시였던 곳들로 이루어져있다. 김해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금관가야의 수도였고 남쪽에 있던 주요 도시였기에 소경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무왕의 외가라는 점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다른 소경과는 달리 방위에 따라 작명되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그러나 이러한 김해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김인광과 김율희 등이 있는데, 이들은 김해와 창원의 경계에 있는 진례산성(進禮山城)을 근거에 두고 김해지역을 아우르는 세력이 되어 지방호족으로서 활약하였다. 신라의 멸망 이후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에 금관소경을 김해부(金海府)로 낮추는데, 이를 보아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기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김해부에서 안동도호부로 변모한 대왜교역의 중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