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느물느물 추리 천재로 다시 태어나다

[리뷰] OCN 드라마 <조선추리활극 정약용>

등록 2009.12.31 13:25수정 2009.12.3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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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추리활극 정약용 포스터
조선추리활극 정약용포스터OCN

<오마이뉴스> 편집국에서 OCN에서 할 <조선추리활극 정약용>(이하 정약용) 리뷰를 써달라고 했다. <별순검> <메디컬 기방 영화관> 등 꽤 괜찮은 케이블 TV 드라마가 나오는 상황이니 지상파 드라마뿐 아니라 케이블 드라마도 조명해 보자는 취지였다. 아직 드라마가 시작되기도 전에 OCN 홈페이지에 들어가 드라마 소개를 훑어보았다. 정약용 역에 박재정, 가상의 인물인 다모 설란 역에 이영은이 나온다고 한다. 오랫동안 많이 힘들었을 홍석천도 다모의 상사로서 매우 비중있는 역할로 출연한다고 했다.

정약용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서는 아까운 천재다.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남겼지만, 자신의 뛰어난 식견을 현실 개혁, 국가 경영에 쓰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쓸쓸히 늙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 서구와 일본의 침략, 식민지 순으로 우리 역사가 흘러감을 알기에 그를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프다. 하늘이 천재를 내렸어도 옹졸한 우리가 그를 시기하여 그 능력을 써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망가져가는 나라를 보며 통탄해했을 그에게 미안해지기도 한다.

OCN 홈페이지에서 본 박재정의 정약용은 우선 비주얼이 마음에 들었다. 뛰어난 통찰력과 추리력을 가졌으면서도 느물느물한, 시쳇말로 요즘 먹히는 이미지의 매력적인 남자로 정약용을 그려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유쾌하면서도 멋진 정약용의 모습을 보여주어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켜 주기를 기대했었다.

너무나 실망스러웠던 <정약용> 첫 방송

 현대에 쓰는 말을 쓴다. 다만, 사극의 느낌을 주기 위해 한자를 덧입혔다.
현대에 쓰는 말을 쓴다. 다만, 사극의 느낌을 주기 위해 한자를 덧입혔다.OCN

지상파만 나오는 TV를 보고 사는 내게 케이블 드라마를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방법을 강구하여 이 드라마를 시청했다. 첫 방송을 본 내 소감을 네 글자로 표현하면 "엄청 실망"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방식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역사 전공자'라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나는 사극 포맷으로 만든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거나, 최소한 당시 시대상황을 바르게 고증해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드라마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정약용>의 많은 부분이 눈에 거슬렸다.

성리학적 윤리의 경직성이 극에 달한 조선 후기인데, 양반댁 아녀자들이 장옷도 입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한다. 그들은 기생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머리에 쓴 가채도 18세기 방식이 아니었다. "엣지남", "보톡스", "A급" 등 최신 유행어도 뒤에 한자를 달기는 했지만, 조선 사람들의 입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가장 용서가 안 되는 장면은 다모가 현대의 여성 형사처럼 남성 수사관들과 동등하게 사건해결에 참여하고, 포졸들은 그를 "다모님"이라 부르는 장면이었다. 다모(茶母)는 여성 피의자들을 조사할 때 차마 남성들이 손댈 수 없는 영역에 도움을 주던 관비(官婢)로서 본업은 차를 끓이는 일이다. 천한 존재였던 다모가 예쁘게 셋팅으로 말아서 반묶음을 한 머리로 남성 양반과 당당히 마주앉아 취조하는 장면에서는 그저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첫 번째 에피소드는 구성조차 치밀하지 못했다. 추리소설을 읽을 때 범인을 예측해 낸 적이 없는 나마저도 "이 시간에 범인이 잡혔는데 아직 15분 정도 남았으니 분명 반전이 있겠군", "진범이 자살하겠군"하면서 예지 능력을 발휘해 냈다. 드라마의 앞날이 걱정되면서도 화가 났다. 또다시 '정약용을 이렇게 밖에 써먹지 못하는가!'하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현대사회에 입힌 조선의 옷

인질극을 벌이는 이들과 협상하는 정약용 조선시대의 느낌을 주기 위해 메가폰을 종이로 만들었다.
인질극을 벌이는 이들과 협상하는 정약용조선시대의 느낌을 주기 위해 메가폰을 종이로 만들었다.OCN

첫방에 실망했지만, 한두 편 더 보고 결정하자는 연락에 다음 편을 보았다. 다음 편은 남사당패 내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소재로 했다. 이번 편은 구성이 탄탄했다. 의외의 인물이 범인이었지만 그가 범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설득력 있었고, 극적 재미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사극이면서도 조선시대를 원형대로 살려내지 않아 실망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편을 보니 다른 각도에서 이 드라마를 용서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사극이 아니라 현대 시사 수사물에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입힌 드라마였던 것이다. <조선추리활극 정약용>은 최근에 사회적 이슈가 된 사건들, 예를 들면 아동 성범죄, 인터넷 악플, 철거민 문제 등이 조선시대에 일어났다면 저렇게 일어나고 저런 식으로 해결되었을 것 같다는 공감이 들도록 만들어 냈다.

드라마는 정약용이 34세 때(1795년) 천주교와 관련되어 탄핵을 받자 정조가 그를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보낸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정통 사극의 관점에서 그 시기를 철저히 고증하여 만들 수도 있겠으나, 드라마가 굳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한직에 있는 정약용을 명탐정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드라마는 정약용이 쓴 <흠흠신서>와 조선시대에 편찬된 법의학 서적 <신주무원록> 등에서 모티브를 따서 한 편 한 편 스토리를 만들어 간다. 이 드라마에서 역사적 고증에 가장 충실한 부분은 여기까지이다.

주막에서 술을 마시는 다모 설란 처녀가 외간남자와 주막에서 대작을 하는 모습. 21세기에 만든 드라마기에 들어간 장면이다.
주막에서 술을 마시는 다모 설란처녀가 외간남자와 주막에서 대작을 하는 모습. 21세기에 만든 드라마기에 들어간 장면이다.OCN

실존 인물 정약용은 15세에 풍산 홍씨 가문의 여인과 혼인을 한다. 34세 때에는 1녀 3남(이 중 맏딸과 3남은 어려서 사망하고 당시 두 아들만 생존해 있음)의 자식을 두었다. 하지만, 드라마 속 정약용은 가상인물 설란과 연애 감정을 점점 발전시켜가는 걸 보면 총각으로 설정된 듯하다. 아무리 개방적인 현대사회지만 유부남과 처녀의 연애이야기를 드라마에 유쾌하게 집어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30대 처녀 총각이 흔하기 때문에 이렇게 설정했겠지만 조선시대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조선시대 여인인 다모 설란이 업무 스트레스로 주막에서 술을 퍼마시고, 정약용이 그와 대작을 해주며 매력을 느끼고, 술을 마시다가 취해서 외간남자 앞에서 쓰러지는 장면도 조선시대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설정이다. 이것은 모두 현대 수사극을 조선시대 풍경으로 리터치 했기 때문에 등장한 장면들인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조선시대와 다른 현대적인 법 감정으로 극을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조선은 아무리 중한 죄를 지었어도 부모가 70세가  넘었고 봉양할 이가 없다면, 부모를 봉양하라고 죄인의 형 집행도 연기해줄 만큼 효(孝)를 중시한 나라였다. 더불어 성리학의 영향으로 의리도 중시했다. 2편에서 누이의 복수를 한 동생과 5편에서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한 딸의 이야기는 실제 조선시대였다면 오늘날과 다르게 보고 다른 판결을 내렸을 것 같다.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 드라마이므로 재미가 없다면 시청자들이 찾아서 챙겨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엄격한 역사적 고증 대신 조선의 옷만 입힌 채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현대적인 수사물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지만 케이블 드라마에서 가끔 문제가 되는 선정적인 소재나 장면은 쓰지 않았다. 아무리 엄격하게 보아도 15세 이상(사실 12세 이상이면 충분하다고 본다)이면 시청해도 될 만큼 이 드라마는 지상파 드라마만큼 건전하면서도 충분히 재미있다.

케이블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다

첫방에 실망했을 때도 내가 실망한 부분은 배우들의 연기가 부족하거나, 화면이 조잡해서가 아니었다. 스토리가 엉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배우들의 열연이 아깝고, 이렇게 아름다운 화면을 찍어준 카메라가 아깝다고 생각했었다. 다행히 다음 편부터는 이야기 구조가 탄탄해져서 흡족하게 감상하고 있다.

예전에 여행가서 머문 숙소에서 케이블 TV를 보았는데, 그때 본 것이 <메디컬 기방 영화관>이었다. 치색(治色)이라는 어쩔 수 없이 선정적인 소재를 다루기는 했지만, 스토리도 탄탄하고 화면의 색감도 참 아름웠다. 한정된 수의 시청자만 보는 케이블 TV에서 이런 드라마를 제작하고 방영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조선추리활극 정약용>은 앞의 두 작품이 성공하였기에 만들 수 있었던 작품인 것 같다. 그리고 시청자의 눈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소재를 끌어들이지 않고 작품성이라는 정공법으로 승부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언젠가는 케이블 TV의 드라마도 시청률 2%, 4% 정도가 성공이 아니라 수십 % 정도는 나오는 시절이 오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도 케이블 TV 드라마가 다양한 실험과 소재로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원천으로서의 기능을 해주기를 기대해 본다.
#조선추리활극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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