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으레 살아가는 방식 그대로 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렇다고 무슨 엄청난 '역주행'을 시도한 것도 아닌 것 같은 한 남자가 있다. 삶을 고민하기보다 삶을 즐기는 데 더 마음을 두어야 할 나이에 이 남자는 되레 삶을 '접고' 그대로 멈추어버렸다!
한 여자의 남편이며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삶을 그대로 다 그 자리에 두고 남자는 사라져 버렸다. 물론 그가 죽었다는 말도 아니고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남자는 그동안 살아온 삶을 그대로 멈추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고요한 관찰자가 되었다. 그래, 그는 삶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행복한 나날'을 시작한 노인, 그는 서른 다섯
어느 가을날 벤치에 앉아 함께 지내는 사람들과 평범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남자는 삶을 '퇴직'하기엔 일러도 너무 이른 서른 중반이다. 스스로 세상에 '퇴직' 선언을 하고 '행복한 나날'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그는 흔치 않으며 이해하기도 힘든 행동을 했던 시기를 열여덟 나이로 끌어당긴다. 벤치에 앉아 '행복한 나날'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그는 열여덟 살 그가 했던 일을 말한다. 앙투완의 '행복한 나날'은 꽤 오래 전부터 준비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렇다, 그의 이름은 앙투완이다.
"열여덟 살에 나는 대체로 평범하다 싶게 인생을 메꾸는 그렇고 그런 일들, 예를 들어 연애나 일, 이상과 야심, 실망과 권태 등을 모두 겪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린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험이었겠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존재의 기쁨과 환멸을 겪었으며, 그 정도면 인생에 대해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라면 앞으로 인생은 더 이상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 어떤 '놀라운' 경이로움도 주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런 야심도 없이 채념한 채 살기로 결심했으며, 앞으로 닥쳐올 일들에 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디에 살지요?"(<행복한 나날>, 10)
앙투완은 열여덟 살에 이미 제 무덤을 팠다! 그가 태어난 이후 그를 위해 부모가 관리해 온 예금통장을 찾게 되었을 때, 그가 그 돈으로 한 일은 다름 아닌 자기 묘지를 사는 일이었다. 한시 임대도 아닌 영구 임대로. 그리고 이렇게 '행복한 나날' 어딘가에 앉아 열여덟 살 이후의 삶을 머릿속으로 읊어대는 그의 귓가로 계속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그런데 당신은 어디에 살지요?"
알 수 없다. 그가 정말 깊이 삶을 고민했던 것인지 그리고 "그런데 당신은 어디에 살지요"라는 반복하는 질문은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 분명 그런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앙투완의 엉뚱한 행동은 흥미롭게도 자기 삶을 숨죽이고 바라보게 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 모습은 매력있다기보다는 차라리 무덤덤하고 무력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게 우리네 삶의 한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다보면 스스로 삶을 '놓아버린' 앙투완의 행동은 되레 우리로 하여금 삶을 가만히 놓고 바라보게 한다.
민간 양로원 '행복한 나날'에 스스로 입주민이 되어 들어온 앙투완. 바라던 대로(?) '노인'이 된 그는 서른 중반이며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평범한 한 남자였다. 평범이라는 말 외에는 딱히 덧붙일 말이 없었을 삶에 스스로 충격을 주고는 이내 다시 평범한 일상을 엮어가는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사실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그가 한 순간에 삶을 '놓아버리고'(!) 얻은 것은 아마도 "당신은 어디에 살지요"에 대답할 수 있는 시간 뒤의 시간, 공간 두의 공간, 삶 뒤의 삶, 평범한 나날 뒤의 '행복한 나날'이었을 것이다.
"지금 어디에 사나요?"..."곧 말해줄게, 알, 곧 말해줄게"
"평생 나는 나를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멈추어버린 시계처럼 무덤덤하기만 하였을 앙투완의 삶은 한 여자를 통해 잠시나마 예상치 않은 생기를 얻었다. 더 이상은 행복한 나날을 장담할 수 없는 암 말기인 상태로 양로원에 들어온 한 여자 미레이유를 만났던 것이다. 삶을 떠나 삶을 관찰하던 그에게 다시 삶에 뛰어들게 했던 여자 미레이유와 함께 보낸 시간은 짧았다. 그리고 예상치 않게 '행복한 나날' 밖으로 우울하고도 무덤덤한 동반 외출을 감행한 앙투완은 그 외출 중 미레이유를 떠나보낸 뒤 다시 '행복한 나날'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나마 누군가에게 '행복한 나날'을 선물했다는 작은 뿌듯함을 안고서. 반전도 무엇도 아닌 아주 짧은 행복한 날을 주고받은 그 일이 있은 뒤 날들은 또 흘러만 갔다. 그리고 그는 어느덧 정말 늙어버렸다.
스스로 양로원에 들어왔던 서른 중반의 '노인' 앙투완. 그는 이제 더 이상은 양로원이라고 할 수 없는 '행복한 나날, 여가활동캠프'의 벤치에 앉아있다. "밀짚모자를 두 눈에까지 내리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서 말이다. 노인! 앙투완. 오랜 기간 '행복한 나날'을 가꾼(?) '정원사'로 살아온 앙투완의 삶은 보면 볼수록 좀, 좀 지루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지루한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지극히 평범한 삶의 뒷마당을 그는 그렇게 지루하게 보여주었다. 산다는 게 그렇지 뭘, 삶이란 게 그런 거야, 라고 말하고 싶었던 듯.
노인! 앙투완을 둘러싼 아이들 중 알랭이라는 한 아이가 묻는다. "아저씨, 아저씨는 어디에 살지요?" 앙투완이 말했다. "내가 너를 알이라고 불러도 괜찮니?" 아이는 흔쾌히 허락하며 다시 묻는다. "좋아요, 그런데 아저씨는 어디에 살지요?"
앙투완은, 오래 전 가을 어느 날 옆에서 마음 속 소리처럼 속삭이듯 물어보던, 그가 알이라고 부르던 알츠하이머를 떠올렸다. (아이 이름은 분명 그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일까, 앙투완은 거듭 묻는 아이에게 혼잣말하듯 대답한다. "곧 말해줄게, 알, 곧 말해줄게."
그리고 다시 누군가 묻고 또 묻는다. "지금 어디에 사나요?" 지금 어디에...
행복한 나날
로랑 그라프 지음, 양영란 옮김,
현대문학,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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