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파탄 책임 배우자도 이혼청구 가능

대법 "부부생활 파탄나고, 혼인생활 유지가 참을 수 없는 고통 줄 때"

등록 2010.01.07 13:04수정 2010.01.07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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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과 외도로 혼인파탄의 책임이 있는 유책배우자라 하더라도 혼인관계가 유지되는 게 유책배우자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게 될 정도라면 이혼 청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비록 혼인파탄에 따른 오기나 보복감정은 아니더라도 한쪽 배우자의 혼인계속의사에 따라 혼인의 실체를 상실한 외형상의 법률혼관계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다른 배우자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기 때문이라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법원은 그동안 혼인파탄의 책임을 물어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이번 판결은 '유책주의의 예외'를 인정한 것이어서 향후 이혼소송에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결혼생활은 6년…별거생활은 11년

A(43,여)씨와 B(47)씨는 1990년 혼인신고한 후 두 자녀를 낳았으나, 남편 B씨의 잦은 음주와 외박으로 원만하지 않자 A씨는 1997년 11월 가출했다. 그러다가 2003년 9월 B씨의 설득으로 A씨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으나, 불과 한 달 만에 '미안하다'는 편지를 남기고 다시 가출해 현재까지 별거상태에 있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6년인 반면 별거생활은 11년간이나 됐다. 남편 B씨는 별거기간 동안 수차례 아내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등 혼인생활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아이들은 자신의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양육해 왔다.

하지만 A씨는 남편의 노력과 아이들도 엄마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 다른 남자를 만나 동거하면서 이듬해 2월 기형아를 낳았다. 기형아인 딸은 지속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혼인관계가 해소되지 않아 가족관계등록부에 등록하지 못해 치료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에 A씨는 "혼인 파탄의 책임이 남편의 잦은 음주와 외박에 있다"며 이혼 소송을 냈고, 조정기일에서는 "B씨와 혼인생활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났으니, 제발 새로 태어난 아이의 치료와 양육을 위해서라도 용서해 달라"며 호소했다.

A씨는 또 "두고 나온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현재는 출산과 양육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없으나 형편이 나아지면 양육비를 부담하겠다. 현재와 같은 상태가 지속된다면 자살할 수밖에 없다. 부디 나중에 양육비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이혼에 응해 달라"고 남편 B씨에게 호소했다.


반면 B씨는 "아이들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고, 나도 혼인관계가 지속되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가 딸을 낳은 사실을 알지 못하니 딸을 동거남에게 맡기고 귀가해야 한다"라고 주장해 조정이 성립되지 않았다.

1심, 혼인파탄 책임 '중혼' 유지한 원고에게 있어 이혼청구 불가

1심인 광주지법 가정지원 가사부(재판장 김재영 부장판사)는 2008년 11월 가출한 A씨가 남편 B씨를 상대로 낸 이혼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혼인생활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파탄에 이르게 된 데에는 잦은 음주와 외박으로 갈등을 야기한 피고의 잘못이 일부 있지만, 오히려 근본적이고 주된 책임은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은 채 어린 자녀를 남겨둔 채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실질적인 중혼관계를 유지하면서 딸까지 둔 원고에게 있다"고 밝혔다.

이어 "따라서 이 사건은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이고, 피고도 혼인을 계속할 의사가 없음이 명백함에도 오기나 보복적 감정의 발로에서 이혼에 응하지 않고 있다고 볼 만한 예외적 사정 또한 엿보이지 않는다"며 이혼청구를 기각했다.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 받아들인 항소심의 판단은?

하지만 항소심의 판단은 달랐다. 광주고법 제1가사부(재판장 선재성 부장판사)는 지난해 6월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라는 이유로 이혼을 불허한 1심 판결을 깨고, "A씨와 B씨는 이혼하라"고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먼저 "원고와 피고의 혼인관계는 심각하게 파탄돼 다시는 결혼공동체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고, 원고에게 새로이 태어난 딸을 버려두고 피고와의 혼인을 계속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돼 원고가 자살에 이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원고와 피고의 혼인관계는 민법 제840조 제6호가 정한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는 때'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어 "상대방이나 자녀가 이혼으로 인해 정신적ㆍ사회적ㆍ경제적으로 심히 가혹한 상태에 처하게 되는 등 이혼청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현저하게 사회정의에 반한다고 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인정되지 않는 한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라는 이유만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를 인정하지 않는 주된 이유는 가능한 가정의 해체를 막아 미성년자 자녀의 이익을 보호하고 남성에 의한 여성의 축출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함인데, 오늘날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여성이 이혼청구를 주도적으로 하는 현실에서는 여성 보호의 의미가 퇴색됐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또한 재판과정에서 장황하게 상대방의 잘못을 주장해야 하므로 공개법정에서 상대방의 지난 잘못을 낱낱이 드러내 공격해야 하는 결과 부부사이에 깊은 감정의 골이 생기게 하고, 그에 따라 이혼 후 자녀양육이라는 공동의 의무를 다하기 어렵게 돼 오히려 미성년자 자녀의 보호에 역행하게 되는 폐단이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

재판부는 "현재 선진국의 이혼법은 한쪽 배우자에게 유책행위가 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혼인관계가 파탄된 경우 이혼을 인정하되, 경제적 약자의 지위에 있는 배우자나 자녀를 보호하고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가 상대방에게 가혹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혹조항을 두는 '파탄주의'로 이행하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특히 "유책배우자라는 이유로 이혼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면 독립적인 인격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야 할 혼인관계에 따른 배우자로서의 지위와 그에 따른 의무 이행을 국가가 강제하는 것이 돼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침해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부부관계가 이미 파탄돼 회복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이혼을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서로 상대방에 대한 원망과 불신의 감정이 쌓이게 되고 자녀의 양육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날 뿐 아니라 유책배우자로서는 자녀에 대한 부모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해도 상대방과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자녀를 면접교섭하기도 어려워 부모로서의 양육책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이번 판결의 근거가 됐다.

이와 함께 "유책배우자의 의무위반행위에 대해서는 위자료청구로써 책임추궁이 가능함에도 유책배우자라는 이유만으로 재판상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이혼이 절박한 유책배우자로서는 상대방이 요구하는 대로 많은 액수의 위자료를 지급한 후 협의이혼하는 방법밖에 남지 않는데, 경제적 능력이 없는 경우 이마저 불가능해 결과적으로 원하지 않는 배우자로서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원고와 피고의 동거기간이 7년 남짓인데 비해 별거기간은 11년 이상으로 더 장기간인 점, 자녀는 현재 고1과 중3으로 원고의 돌봄이 없더라도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고 해결해 갈 수 있는 나이지만, 원고가 출산한 신생아는 기형 장애를 지니고 있어 원고의 보살핌이 필요한 점, 부부가 재결합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점, 만일 원고가 자살이라도 한다면 자녀들의 이익에 오히려 반하게 돼 이혼청구를 기각해 현재 상황을 지속하는 것보다 혼인관계를 정리하는 게 자녀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시했다.

대법 "혼인유지가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라면 이혼해야"

사건은 B씨의 상고로 대법원으로 올라갔으나, 대법원 제3부(주심 신영철 대법관)도 A씨가 남편 B씨를 상대로 낸 이혼 청구소송에서 이혼을 받아들인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7일 밝혔다.

재판부는 "별거상태가 장기화 되면서 원고의 유책성도 세월의 경과에 따라 상당 정도 약화되고, 원고가 처한 상황에 비춰 사회적 인식이나 법적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으므로, 현 상황에서 원고와 피고간의 혼인파탄 책임의 경중을 따지는 것은 곤란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피고의 혼인계속의사에 따라 현재와 같은 파탄 상황을 유지하게 되면, 특히 원고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계속 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이는 점, 혼인제도가 추구하는 목적 등에 비춰 보더라도 혼인 파탄에 이르게 한 원고의 책임이 반드시 이혼을 못하게 할 정도로 중대할 정도는 아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부부공동생활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A씨와 B씨의 관계가 파탄되고 그 혼인생활은 계속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이라며 "혼인을 파탄에 이르게 한 A씨의 책임이 반드시 이혼을 못하게 할 정도로 중대할 정도는 아니다"고 판시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유책배우자 #이혼청구 #혼인파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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