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미쳐 공부 포기? 우릴 뭘로 보고..."

[기획-학생인권②] 1986년 노랑머리에 대한 기억, 그리고 두발자유

등록 2010.01.20 22:13수정 2010.01.20 22:13
0
원고료로 응원
a  경기도교육청이 시도교육청으로는 전국 최초로 추진하는 학생인권조례 초안이 2009년 12월 17일 발표되었다. 사진은 11월 20일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제정 추진 과정을 도민들에게 보고하는 김상곤 교육감.

경기도교육청이 시도교육청으로는 전국 최초로 추진하는 학생인권조례 초안이 2009년 12월 17일 발표되었다. 사진은 11월 20일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제정 추진 과정을 도민들에게 보고하는 김상곤 교육감. ⓒ 경기도 교육청


"학생은 복장, 두발 등 용모에 있어서 자신의 개성을 실현할 권리를 가진다. 특히 학교는 두발의 길을 규제하여서는 아니된다."

지난해 12월, 경기도 교육청은 위와 같은 내용이 담긴 '학생인권조례' 48조의 초안을 공개했다.

보수언론은 시기 상조, 교권추락 등을 이유로 반대했고, 인터넷에서는 찬반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2010년 아이폰, 안드로이드폰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춘 스마트폰을 어떻게 하면 마음에 맞게 선택하고 꾸밀까 고민하는 최점단 세계화 시대에 학생의 두발 자유 논란이라니... 이게 논쟁거리가 되기는 하는 건가.

두발 규제하지 말라, 이게 논란거리인가?

1980년대 중후반, 나는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때 머리? '당연히' 제한과 단속의 대상이었다. 감수성 예민한 내 청춘은 스포츠머리에 갇힌 채 6년을 견뎠다. 남녀공학을 다녔던 내가 받는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지만 한껏 외모에 신경 쓸 나이에 귀밑머리 5센티미터를 지켜야 했던 여학생들의 스트레스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학생들은 매일 아침 선도부원들을 대동한 서슬 퍼런(이건 뭐 흡사 군부대와 같은 풍경이었다) 선생님들의 두발 단속을 피하려 이른 새벽 등교했다. 자주 다듬는 것이 귀찮아 큰 맘 먹고 삭발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단속에 걸리면 "머리 신경 쓸 시간에 공부나 하라"는 지겨운 메아리가 울렸고, "너 지금 반항하냐"는 똑같은 말씀만이 뜨거운 청춘의 가슴 속을 후벼 팔 뿐이었다.

남녀 불문하고 1cm라도 더 머리카락을 길러보려는 학생들의 몸부림은 차라리 발악에 가까웠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의 머리모양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도대체 왜 학생들의 머리는 규제를 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86년, 미국 교환학생들의 외모에 충격받았던 이유

a  지난 6일, 수원의 인권 시민사회단체가 경기도교육청 앞에 모여 학생인권조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 6일, 수원의 인권 시민사회단체가 경기도교육청 앞에 모여 학생인권조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허진무


학생들의 두발을 규제하는 명분은 언제나 '학생다운 모습'을 위함이다. 머리가 길면 탈선하기 쉽고 공부에 소홀해지기도 쉽다는 아주 간결한 주장에 근거한다. 과연 이 주장은 합당한 것인가? 보수언론이나 보수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들이 논거로 들이대기 좋아하는 서양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중학교 3학년 시절(1986년) 문화적인 충격을 심각하게 받은 적이 있다. 남녀 공학이던 우리 학교와 자매결연 한 미국의 모 학교에서 교환학생들이 왔을 때였다.

미국 학생들의 모습은 외양만으로 본다면 흡사 문제아들을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울긋불긋 파마를 했는지 염색을 했는지 모를 총천연색의 머리 색깔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뿐인가. 귀걸이는 기본이고 한 눈에도 확 구별되는 화장기 있는 얼굴에 짧디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의 모습은 우리들을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충격에 휩싸였던 우리 학교는 서울 강남 8학군에 위치해 있었다. 즉, 전국에서 상대적으로 복장이나 두발 등의 제한을 비교적 적게 받았던 학교였다. 또한 유명 브랜드 옷과 신발 등을 어렵지 않게 착용하는 등 비교적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자란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우리들의 눈에도 미국의 학생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와 다른 점은 겉모습 한가지뿐이었다. 16살에 어울리는 호기심을 공통점으로 삼아 사나흘 동안 지켜본 그들의 생활과 생각은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성에 대한 관심과 빨리 성인이 되려는 갈망 그리고 불안하기는 하지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 등 국적을 초월한 공감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지금, 학생들의 두발을 규제하려는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당시(그것도 벌써 14년 전 일이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파마에 염색을 한 미국학생들은 모두 불량 학생이거나 공부를 못 하는 학생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온 이들이라면 학교에서 그다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학생들이 아니었을까. 아니, 오히려 모범생에 가까웠을 것이다. 문제아들을 데리고선 외국에 나갈 학교는 거의 없을 테니까.

고교생 "머리에 미쳐 공부를 포기하나요?"

a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 올라온 두발 검사 사진. 단속에 걸린 학생들이 엎드려 뻗쳐를 하고 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 올라온 두발 검사 사진. 단속에 걸린 학생들이 엎드려 뻗쳐를 하고 있다. ⓒ 권박효원


아직까지 당시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들의 개성 넘치는 외모의 자유로움이었다. 미국 학생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 중학생들도 이런 머리 모양새가 가능하구나'라는 걸 몰랐었다. 아니, 머리길이 등에 대한 제한에 반발은 했었지만 굳이 깊은 고민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것이 학생인권과 관련한 것임을 깨달은 지금은 함께 고민하며 두발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나 지금이나 교문 앞과 교실 곳곳에서 머리카락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느라 진을 빼는 건 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선생님들에게 결코 도움이 안 된다. 사실, 불합리한 규정을 설명하느라 애쓰는 선생님의 모습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오죽했으면 조례 초안에조차 다른 조항들과는 다르게 두발규제와 관련해 "특히 학교는 두발의 길이를 규제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강력한 문구를 집어 넣었을까.

'학생들의 두발 자유'를 놓고 "시기상조, 공교육붕괴" 등을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인권에 반하는 반교육적인 작태임에 분명하다. 현재 경기도 학생인권 조례제정 자문위원회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온 조례 찬성 의견을 살펴보면 학생들의 요구는 그리 과하지 않다. 부디 학생들에게 두발의 자유를 허하라.

"선생님들의 착각이 학생들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줍니다. 두발? 저희도 대학이라는 목표가 있는데 과연 머리에 미쳐 공부를 포기하겠나요? 오히려 저희도 학생이라 학생 때에 해보고 싶은 멋 부리기 같은 거 해볼 수 있는데, 그걸 그렇게 심하게 막는 선생님들에 대해 더 스트레스 받고 반항심이 생기는 것입니다."(고등학교 재학 중인 한 여학생)

"전부터 우리 학생인권은 거의 무시되어왔습니다. 두발, 용의복장, 학교마다 다른 특이한 규정 등이 학생들이 펼치고자 하는 꿈과 표현을 강하게 억제하고 자유라는 것이 없기에 학생들이 무언가를 해냈을 때 성취감을 얻기보다는 누구나 해야 하는 의무적인 일을 했다라고 느끼고 열의를 잃는 것입니다."(김시경)
#학생인권조례 #두발 자유 #학생인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전북 순창군 사람들이 복작복작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3. 3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4. 4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5. 5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