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철 네번째 시집 <로깡땡의 일기>모두 5부에 시 64편이 실려 있는 이번 시집에는 '혼란'과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며 구토를 하기도 하고, 저항을 해 보기도 하다가, 급기야 '탈출'을 하려는 '시인 자화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종찬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전기철(56, 숭의여대 문창과 교수)이 네 번째 시집 <로깡땡의 일기>(황금알)를 펴내며 짤막하게 두 줄로 남긴 '시인의 말'이다. 그는 왜 스스로를 버리기 위해 시를 쓰고 있는 것일까. 시어 하나 하나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시인 몸을 돌아다니는 백혈구와 적혈구가 쑥쑥 빠져나간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글쓴이가 전기철을 만난 것은 지난 1980년대 허리춤께였다. 그때 그는 마악 문단에 나온 새내기였지만 작가회의 문인들과 술좌석에서 자주 어울렸다. 그에게는 묘한 술버릇이 하나 있었다. 문인들이 거나하게 술에 취해 술집을 빠져 나올 때쯤이면 계산대로 가서 마시던 500cc 생맥주컵 값을 내고 술이 반쯤 남아 있는 잔을 들고 나왔다.
그는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그 컵에 남아 있는 생맥주를 마시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생맥주를 달게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와 문학 이야기를 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머리를 길게 길러 여자처럼 머리핀을 꽂고 다니고 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가. 그가 쓴 시를 알려면 그가 살아온 발자취를 살짝 엿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모두 5부에 시 64편이 실려 있는 이번 시집에는 '혼란'과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며 구토를 하기도 하고, 저항을 해 보기도 하다가, 급기야 '탈출'을 하려는 '시인 자화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니, 조금 더 꼼꼼하게 속내를 들추자면 이 시집은 '시인 자화상'이자 '이 세상 자화상'이다.
"당신은 나를 위해서 그것도 못 참아요"아내는 나를 조금씩 바꾼다. 쇼핑몰을 다녀올 때마다 처음에는 장갑이나 양말을 사오더니 양복을 사오고 가발을 사오고 이제는 내 팔과 다리까지도 사 온다. 그때마다내 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투덜거리지만 아내는 막무가내다.......내 심장이나 성기까지도 바꾸고 싶어 하는 아내는 늘 돈이 모자라서 쩔쩔 맨다.-14쪽, '아내는 늘 돈이 모자란다' 몇 토막 시인 전기철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살 수 있는 그야말로 물질 만능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다. 시인은 아내가 사오는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바라보며 사람 몸마저도 돈으로 팔고 사는 그런 무서운 세상이라고 여긴다. "얼마 전에는 술을 많이 마셔 눈이 흐릿하다고 했더니 / 쇼핑몰에 다녀온 아내가 눈을 바꿔 끼라"고 했다.
시인은 깜짝 놀라 "어떻게 눈까지 바꾸려고 하느냐, 그렇지 않아도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 아내는 "그건 그 사람들이 구식이라 그래요"라며 시인을 비웃으며 나무란다. "옆집 남자는 새 신랑이 되었어요. 당신은 나를 위해서 그것도 못 참아요"라며.
시인은 시무룩해진 아내가 안쓰러워 그냥 넘어간다. 그렇게 그냥 넘어가는 날이 이어질수록 시인 모습은 점점 다른 사람 모습으로 바뀌어간다. 시인은 스스로 옛 모습을 찾기 위해 아내보다 먼저 일어나 거울 속에서 내 자신이었을 흔적을 찾는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옛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탈출'은 곧 희망으로 가는 지름길배우 옥소리가 간통을 당했다. 나는 도쿄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이웃집 형은 직장을 잃고 개 사냥꾼으로 나섰고 친구 동생은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장난감이나 들고 다니며 공원에서 하루를 보내고 왔다.-36쪽, '샤도우 문' 몇 토막인기 여배우, 인기 남배우가 간통 등으로 잇따라 고소당하는 세상... 도덕윤리가 깡그리 무너진 것만 같은 어지러운 세상... 시인이 사는 동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지금 시인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더 이상 숨 쉴 곳이 없어 새들도 아침이면 와서 울지 않"고, 시인은 "도쿄로 도망 갈 날짜만을 달력에다 계속 바꿔" 달고 있다.
시인 "선배는 또 다른 세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눈이 휘둥그레질 돌을 발에 묶고 강바닥으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나는 곧 도쿄로 가야 한다"고 변명한다. 돌멩이를 발에 묶고 강바닥으로 내려간 선배가 새로운 세상을 찾았는지 궁금한 그때 하늘에서 "금세라도 무슨 말을 내뱉을" 것만 같다.
이 시에서 말하는 배우 옥소리는 시인 자신이기도 하고, 개 사냥꾼이 된 이웃집 형이기도 하고, 오늘도 골목에서 장난감을 굴리고 있는 친구 동생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이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는 길은 '현실 도피'가 아닌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탈출'뿐이다. 따라서 시인이 말하는 '탈출'은 곧 희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 세상 피멍을 온몸에 새기며 함께 아파하는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