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1지구 재개발 현장폐허가 된 어느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왕십리 1지구 재개발 현장.
김도균
재개발 열풍에 전세가는 천정부지로... "갈 수 있는 데가 없었다" 서울 시내 여러 곳이 뉴타운 지구로 지정되면서 서울 시내의 전세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4000만 원 하던 전셋집이 1억 원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왕십리 뉴타운 지역에 들어설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는다 해도 입주할 때까지 거주할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재개발 지역에 살던 세입자들이 기존의 생활권을 벗어나지 않는 인근지역에서 (재개발) 공사 기간 동안 거주하다가 원래 살던 곳에 다시 정착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울시 자료에 의하면 뉴타운 지역 세입자의 재정착률은 10% 남짓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자리와 자녀교육 때문에 삶의 근거지인 왕십리 주변을 벗어나기 힘들었던 세입자들에게 두 배 이상 오른 전세가는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씨는 "전세보증금에다 이주보상비 1000만 원을 합쳐도 서울 시내에서 갈 수 있는 데가 아무데도 없었다"고 말했다. 왕십리동에서 4000만 원에 방 두 개짜리 전셋집에 살던 김아무개씨는 인근 마장동에서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을 내는 단칸방을 간신히 구할 수 있었다. 엄청나게 올라버린 주거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세입자들 중 일부는 서울을 떠나 의정부나 포천, 구리 등으로 밀려났다.
"용역업체 직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동네가 전쟁터가 되어갔어요. 주민들이 지나가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없이 산다는 이유로 설움을 받는다는 생각에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이지연씨)
철거 폭력을 견디다 못한 세입자들이 하나 둘 왕십리를 떠났고 빈 건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주를 거부하고 왕십리 1구역에 남은 세입자들이 사는 집 주변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다. 작년 8월에는 고아무개씨 집에서 불이 나서 살림살이를 모두 태우기도 했다. 세입자들이 이곳을 빨리 떠나기를 바라는 세력의 소행으로 추정되었지만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정말 겁이 났어요. 잠시만 집을 비우려고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해서 시장 가기도 망설여졌어요. 밤에 집에 불이 나는 꿈을 몇 번이나 꿨는지 몰라요." (최아무개씨)불안에 떨던 세입자들이 성동구청을 항의 방문해서 그나마 동네 곳곳에 CCTV가 설치된 후로는 화재가 줄어들었다.
그동안 왕십리 1구역 세입자대책위원회(아래 왕십리 1구역 세대위)는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아래 도정법) 제36조에 따른 주거 대책을 강구할 것을 줄기차게 성동구청에 요구해왔다. 이 조항은 "(재개발) 사업시행자는 재개발로 철거되는 주택의 소유자와 세입자에게 임대주택 등의 시설에 임시로 거주하게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조항을 재개발조합은 의무조항이 아니라고 해석하고, 성동구청에서도 법 규정을 지키지 않은 재개발조합 측에 사업인가를 내줌으로써 사실상 직무유기를 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따랐다.
작년 9월 왕십리 1구역 세대위는 '성동주민회',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등과 공동으로 '성동구 임시주거시설 조례제정운동본부'를 구성했다. 도정법에 규정된 임시주거시설 입주를 가능하게 하려면 성동구의회에서 이를 강제할 수 있는 조례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촉구하는 주민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서였다.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이 서명운동에는 5천여 명이 넘는 성동구민들이 참여했다.
그러던 중 작년 11월 정부가 재개발 지역 세입자들에게 '순환형 임대주택'에 입주할 권리를 규정한 도정법 시행령을 마련하면서 왕십리 1구역 세입자들에게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시행령에 따르면 신청일 기준으로 해당 정비구역에 2년 이상 거주한 세대주 가운데 월평균 소득이 전년도 도시근로자 평균의 70% 이하인 거주자는 순환용 주택을 우선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