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변기가 막혔다. 겨울 들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열흘에 한 번꼴도 아니고, 보름에 한 번꼴도 아니다. 어떤 때는 뚫어놓은 지 사흘도 안 되어 막히고, 또 어떤 때는 보름이 지나도록 아무 일 없이 쑥쑥 잘 내려가기도 한다. 어쨌든 그것도 이력이라고 이제는 세 시간 정도 작업을 하면 뚫린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지만, 급한 일은 당연히 밖에서 덜덜 떨어가며 처리해야만 한다.
시골에 살면서도 용변만은 파리나 쥐들의 방해공작에 시달리지 않고 우아하고 상쾌하게 처리하고 싶다는 나름 소박한 욕망이 있었더랬다. 울며 겨자 먹기 식이 아닌, 가고 싶어 갔으면서도 얼른 나와 버리고 싶은 곳이 아닌, 신문이나 책을 들고 가끔은 콧노래도 부를 수 있는 그런 머물고 싶은 화장실을 만들어보자 하는 생각으로 나름 머리를 쥐어짰었다. 이렇게도 소박하게 우아한 욕망이 눈 쌓인 밖에서 엉덩이를 내놓고 벌벌 떨어야만 하는 계기로 둔갑할 줄은 당연히 꿈에서도 몰랐다.
누군가 그랬다. 사람이 치매에 걸린다는 것은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실제'의 어린아이는 자기가 싼 똥에 대해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껴서 그것을 감추고자 하지는 않는다. 다만 불쾌와 불편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오히려 당당하게 치워달라고 고래고래 악을 써서 엄마를 불러들인다.
치매 상태의 어린아이는, 그러니까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똥을 눈 뒤에 그것을 치워달라고 누구를 부르는 대신 혼자서 열심히 작업을 하신다. 전등을 켜고 끄지도 못하고, 텔레비전을 켜고 끄지도 못하게 된 어머니는 용변을 본 뒤에 물을 내리면 그것들이 말끔하게 사라진다는 것도 잊어 버렸다. 때문에 당신이 손수 그것을 처리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된 어머니의 똥에 대한 인식은 저 먼 옛날, 오늘날 화장실이 아닌, 뒷간이라고 불렀던 그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그 시절의 뒷간은, 파리와 쥐들이 들끓어서 기분이 언짢기는 했어도 똥이 한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손을 내민다 해서 그것이 손에 잡히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이냐. 똥이 왜 한눈에 보이는 것이지? 저것이 어째서 냉큼 사라지지 않고 둥둥 떠서 손을 내밀면 잡히는 것이지? 어머니는 아마 어느 날 문득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내심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혼자 사는 집도 아니고 다른 식구가 있는데 이 무슨 창피란 말인가. 그래서 일단 그놈의 똥 덩어리를 눈에 보이는 바가지로 떠올렸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하지? 마침 목욕통이 눈앞에 보인다. 높이가 거의 일 미터에 달하는 목욕통 안으로 버린다. 안 보인다. 됐다.
아들인 내가 어머니의 그러한 고심을 일목요연하게 읽어내기까지는 당연한 얘기로 한참이나 걸렸다. 어느 날 목욕을 하자고 물을 끓여놓고 목욕통 안을 들여다보니 무슨 덩어리들이 있었다. 한눈에도 똥 같기는 한데 그것을 똥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손으로 주물주물 만져보고, 코에 대고 킁킁거려 보고, 입에 넣어 잘근잘근 씹어본 뒤에서야 똥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래도 설마, 여전히 고개는 갸웃거렸다.
똥이 어떻게 해서 그 안에 있을 수 있는가 말이다. 뒷집 교회당에서 고양이들이 가끔 원정을 오기도 하는데 혹시 그 녀석일까?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고양이 똥 치고는 너무 컸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역시 아니었다. 아닐 것 같았다. 어머니가 그 안으로 들어가서 똥을 눈다는 것은 도대체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목욕을 할 때도 어머니에게는 목욕통을 쓰지 않고 따로 고무통을 쓰고 있었다. 너무 높아서 어머니가 들어가고 나오기에는 불편했고 위험스럽기조차 해서였다. 그런 목욕통 안으로 어머니가 혼자 힘으로 들어가서 똥을 누고 다시 나온다는 것은 꿈에서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목욕통 안의 그것은 똥이 분명했고, 그 주인공은 어머니 외에 달리 생각해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어느 미친 사람이 남의 집에 와서 그것도 목욕통 안에 똥을 누고 달아날 것인가.
그리하여,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염탐과 미행이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어머니께서 화장실 문을 여는 기척만 들렸다 하면 살금살금 다가가서 귀를 기울이다가 빠꼼이 문을 열고 엿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머니는 내가 엿보는 시간에 똥을 누고 처리하는 장면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다. 이십사 시간 감시체제를 유지할 수는 없다는 것을 어머니가 미리서 알고 피해간 것은 물론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보름도 훨씬 지나서야 현장이 내 눈에 잡혔다.
변기가 막히다, '뚫어뻥'으로도 뚫리지 않는다, 어쩌나...
화장지를 뜯어서 뒤처리를 하는 것까지는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뒤처리를 끝내고 옷을 올리기 직전에 손을 뒤로 돌려 물을 내리는 과정이 생략되고 있었고, 옷을 올린 뒤에 잠깐 돌아보고 앞으로 나오는 대신 당신이 돌아서서 변기 안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과정이 추가되고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며 뭐라고 불만이 섞인 혼잣말을 하시고, 손으로 그것을 건드려보는가 싶더니 바가지를 들어 그것을 떠내고 있었다.
"엄마, 엄마, 그것은 그냥 놔둬.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냥 놔두면 내가 물을 내려서 없앨 테니까, 응? 알았지? 절대로 손을 대면 안 돼, 응?"
어머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민망한 표정인 채로 응, 응, 알았어, 하셨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다음 날도 똥은 여전히 목욕통 안에 들어가 있었다. 가을이 되고 막내아우가 결혼을 한 뒤의 어느 날인가부터 그런 현상이 문득 사라지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변기가 막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막힘이려니 생각하고 '뚫어뻥'을 사용해 보았지만 뚫리지 않았다.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내 준다는, 화장실 전용 약품을 사다가 잔뜩 넣어 보기도 했지만 역시 뚫리지 않았다. 변기를 통째로 들어내야 하나 어쩌나 고민을 하다가 불현듯 집히는 바가 있어 물을 죄다 퍼내고 손으로 구멍을 후벼 보았다. 손가락에 잡히는 게 있기는 한데 그러나 잡아서 끌어낼 수는 없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온갖 부산을 떨다가 생각해낸 것이 강철심이었다.
낚싯줄 정도의 두께에 자유자재로 휘어지기는 하지만 여간해서 끊어지는 법은 없는 강철심으로 꼬무락꼬무락 마치 감옥의 죄수가 땅굴을 파듯이 작업을 한 결과 구멍은 뚫렸다. 그런데 그렇게 끌려나온 물건들이 참으로 다양했다. 화장지가 뭉텅이로 나오기도 하고, 깔깔이 수세미가 끌려나오는가 하면 수건이나 양말짝 같은 것이 들어 있기도 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똥을 감추고자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지만 이것이 도로 나오고, 다시 또 나오고 하니까 당신 나름의 공법을 개발했던 것이다. 똥 한 번, 화장지 한 번, 똥 한 번, 수세미 한 번, 그리고 양말이나 수건으로 완벽하게 마무리를 짓는 그런 공법을 말이다. 사실로 그것은 거의 완벽했다. 누수공사 전문가들도 이처럼 완벽하게 구멍을 봉쇄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그런 말이 내 입에서 절로 나오고 있었으니까.
한편 생각하면 눈물도 나오고, 우습기도 하고, 뭔가 알겠다는 마음이 되어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그런 복잡한 심사인 채로 당숙을 찾아가서 일련의 과정을 말씀드렸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이랬다.
"너 요새 풀만 먹고 사는가 보구나?"
"예?"
"토끼똥이나 염소똥, 소똥, 그런 것들 알지? 니들 어렸을 적에 손에 들고 한약이라고 놀기도 했지 아매? 그 똥에서 냄새 나던? 그러니께 뭣이냐, 거, 못 먹어서 그래, 못 먹어서, 알겠냐?"
"아닌데요. 어머니는 식사 잘 하시는데요."
"아따야, 너도 참말로 거. 사람이 토끼냐? 염소여? 토끼도 아니고 염소도 아닌 것이 실가리 같은 풀만 먹고 사니께 그렇다, 이런 말이지 내 말은. 실가리만 먹으니께 똥이 딴딴해지고, 굵어지고, 이치가 안 그렇겠냐?"
"그러니까 그것이. 틀린 말씀은 아니겠는데요. 그런데 그것은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봐야지 않은가요? 옛말에 네 똥 굵다고 했는데,"
"네 말도 맞다마는, 내 말은 그러니께 네 어머니 똥이 굵고 단단해서 변기가 자꾸 막힌다면서? 그러니까 고기를 자주 먹게 되면 똥이 묽어져서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이런 말인 것 아니냐."
아 그것도 그렇겠구나, 일리가 있는 말씀이겠다, 싶어서 다음 날부터 돼지고기로 국을 끓여 밥을 말고, 간간이 생선을 얹어드리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웬걸, 어머니의 똥은 여전히 굵고, 단단해서 변기가 막히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어머니가 그만큼 육체적으로는 건강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어서 마음이 낙낙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변기가 막히는 일이 내게 고역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게도 모든 기억이 잔인할 정도로 다 사라지면서도 똥을 부끄러워하는 의식만은 더욱 또렷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은 늙어 노망이 들면 벽에 똥칠을 한다. 이 말은 내 의식에 마치 전설이나 민담의 한 대목처럼 각인되어 있었다. 입에 가득 붉은 피를 물고 조금씩 흘려내는 아랑낭자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심봉사처럼 그렇게, 노인과 똥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어려서는 그런 모습을 더러 보기도 했었다. 작은댁 할머니였는지 고모님의 시어머니였는지 그 주인공은 정확하지 않지만, 손에 잔뜩 똥을 묻혀 들고 열심히 벽에 문질러대고 있다가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흘낏 돌아보는, 안 그래도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더욱 잘게 일그러지면서 기묘하게 변하는 그 표정이 흑백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이러한 그림이 내게 준 인식은 뭐랄까, 사람은 으레 그렇게 하게끔 되어 있다, 하는 정도였다. 따라서 치매 상태의 노인이 벽에 똥칠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행위가 갖는 의미나 그 심리의 저변에 무엇이 깔렸는가 하는 따위는 생각해볼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리하여 노인은 곧 똥이라고 하는, 그런 어떤 추함의 상징으로 인식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그러한 인식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나는 왜, 어쩌다가 그동안은 그렇게도 노인을 똥과 막바로 연결시켜 파악하는 식으로 노인의 존재형태 자체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노인이 똥을 감추고자 하는 것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는 그 중요한 가르침을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받지 못했던 것일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어쩌면 인간이 고안해낸 교육체계는 인간 자신의 행복을 위함이 아니라 제3의 어떤 것, 이를테면 자본이라든가 정치 같은 것에 절대적으로 복종시키고자 하는 전략은 아니었을까 하는 불온한 생각도 가끔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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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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