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 본감사 시작 이후 감사관들의 자료 요구와 직원들 소환이 줄을 이었다. 지난 글에서 설명한 대로 KBS의 거의 모든 드라마 제작과정이 도마 위에 올랐고, 별의 별 자료 요구가 다 있었다. 감사 첫날에는 KBS 전자결재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시스템 설치를 요구하는가 하면, 감사 두번째 날에는 KBS 전직원의 주민등록번호를 달라는 황당한 요구도 있었다. 아예 KBS의 신경망과 몸통을 통째로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경력 사원 모집에 대한 일체의 자료를 요구했다. 본사와 지역국 경력기자 면접 채점표, 경력 기자 단계별 채점표, 경력 사원 채용관련 관련부서 채용 요청 문서, 경력 피디 입사전 경력 현황 자료 등 온갖 자료들을 요구했다. 아마도 경력 사원을 뽑으면서 무슨 비리가 없었는지 다 뒤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들 살아 왔겠지. 그러나 우리에게서는 아무리 뒤져도 나올 게 없었다.
감사원 특조팀, 사장 개인비리 파헤치는 데 몰두
특히 감사원 특별조사본부 소속 감사관들의 활약이 눈에 두드러졌다. 직무감찰이 주업무인 특별조사본부 소속인 이들은 작정한 듯 정연주 또는 경영진의 비리를 캐는 일에 집중하는 듯했다. 그들이 요구하는 자료를 보면 그런 의도가 읽혀졌다.
위에서 언급한 KBS 전자결재 시스템 설치 요구를 비롯하여 정연주 사장 법인카드 지출 증빙, <불멸의 이순신> 후속 대하드라마 제작 결정 관련 편성제작회의록, 2003년 이후 외주제작 계약 현황 일체, 부안의 영상테마 파크 관련 서류, KBS에서 구매하는 영화, 만화 구매 계약 관련 서류 일체 등이었다. 내가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외주제작 계약관련 일체를 제출하라니, 외주제작사의 프로그램 공급과 관련하여 어떤 거래가 있지 않았는지 조사하려는 목적이 분명해 보였다. 실제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국세청의 세무조사도 거의 같은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백남준 미디어아트 전시회와 관련하여 일체의 관련 문서와 작품 선정 경위 등을 요구했고, 나의 법인카드뿐만 아니라 감사, 부사장, 심지어는 비서팀장의 법인카드 집행내역까지 들추고 있었다.
감사원 본감사는 6월 11일부터 7월 11일까지 한 달간 계속되었다. 이 기간 중에 요구한 자료량은, 자료 요구와 면담 요구 한 건을 한 줄로 쓴 A4 용지가 102장에 이를 정도로 방대했다.
그리고 속전속결의 자세로 감사를 진행했다. 2003년 말에 실시된 KBS 특별감사 때는 12월 8일부터 12월 30일까지 1차 본감사가, 이듬해 1월 5일부터 15일까지 2차 본감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해 3월 31일부터 4월 12일까지 3차 본감사가 있었으며, 감사 최종 처분은 5월 21일에 있었다. 그러니까 본감사 시작하고 6개월이 지나 감사 결론이 나온 셈이다.
감사원, 정권의 하수인으로 역사에 치욕 남기다
그런데 2008년 특별감사는 달랐다. 속전속결이었다. 국민감사 결정도 그렇고, 본감사를 주말 빼고 23일간 한 것도 그렇고, 본감사 시작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8월 5일에 감사 결과를 발표한 것도 그렇다. 무엇에 그렇게 쫓겼는지는 자명했다. 베이징 올림픽 시작과 때를 맞춰 정연주 해임을 강행하자는 정치일정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감사원은 정권의 하수인으로 주어진 과업을 하고 있었다.
감사원이 얼마나 그 정치일정에 맞추기 위해 서둘렀는지는 본감사가 끝난 뒤에 진행되는 질문서 발부와 이에 대한 촉박한 답변 시한, 그리고 서둘러 발표한 감사 결과를 보면 절로 답이 보인다. 감사원은 감사가 끝난 뒤 그들이 문제를 삼을 사안들을 뽑아서 질문서를 보낸다. 그것은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와 비슷한 것이다. 답변에 따라 관련자가 징계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처벌을 전제로 한 질문서이기 때문에 답변도 신중하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감사원은 7월 15일에 1차 질문서(16건)를 발부하면서 답변 제출시한을 사흘 뒤인 7월 18일로 잡았다. 2차(7건), 3차(8건) 질문서가 잇따라 왔는데, 제출시한은 여전히 촉박했다. 7월 21일에 보낸 3차 질문서 제출기한이 사흘 뒤인 7월 24일이었다. KBS 직원들에게 방송제작은 뒷전으로 미루고 답변서 만드는 일에 매달리라는 소리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마구 다그치는 모습이었다.
3차 질문서를 보낸 7월 21일, 감사원에서 느닷없이 나의 출두 요구를 했다. 감사원 사회복지국 정아무개 2과장이 KBS 감사실에 전화로 통보를 했다. 1979년 이후 38차례 KBS에 대한 감사원 감사가 있었는데, 사장 출두를 요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감사원에서 답변을 듣고 싶은 부분은 실무부서에서 답변을 작성하면 되는 것이었다. 사장의 답변을 듣고 싶다면 얼마든지 서면으로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전화로 통보를 하면서 이틀 뒤인 7월 23일까지 감사원에 출두하라는 것이었고, 출두 여부를 바로 다음날 오전까지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출두요구를 한 바로 다음 날에도 사장을 대상으로 하는 4차 질문서(1건)가 또 왔다.
"정연주 사장, 감사원에 출두하라" 구두 통보
나의 출두 요구에 앞서 감사원이 세 차례에 걸쳐 보낸 질문서에는 모두 31건의 질문사항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는 사장을 상대로 하는 질문이 10개나 되었는데, 이에 대한 답변서가 아직 준비되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소환 요구가 있었다. 답변을 들으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감사원이 진정으로 KBS의 문제점들을 제대로 진단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얻고자 했다면, KBS로부터 충분한 설명과 답변을 듣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에 그리도 쫓기는지 그냥 속전속결로 다그치는 분위기였다. 정해진 목표와 시한 내 이를 달성하기 위해 속도전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정해진 목표는 당시 천하가 짐작할 수 있었던 '정연주 해임'이었고, 그 시기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 전후여야 했다. 그래야 정연주 해임 이후에 있을지도 모를 정치적 파장을 극소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8월 11일 해임된 이후 나의 해임 파동은 베이징 올림픽 열기에 묻혀 그냥 사그라져 버렸다.
감사원은 그런 목표와 일정에 맞춰 마치 돌격대처럼 일을 해치우는 듯했다. 7월 21일 감사원 사회복지국 정아무개 2과장이 전화로 이틀 뒤에 나의 출두를 요구하면서 출두 여부를 다음날 오전 중으로 통보하라고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나는 우선 앞으로 KBS와 감사원 사이에 나의 출두 문제를 둘러싸고 오가는 의견교환은 전화가 아닌 문서로 할 것을 지시했다.
첫 출두 요구에 대해 KBS는 이런 요지의 답을 다음날 감사원에 문서로 보냈다.
"KBS에서 지금 감사원 질문서에 대해 서면답변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 답변을 먼저 검토한 이후 필요하다면 사장 면담을 요청하는 것이 타당한 일이라 생각함. 그리고 검찰이 배임 혐의로 정연주 사장의 소환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감사원까지 나서 직접 출석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함. 그리고 사장의 감사원 출두를 전화를 통해 구두 통보하는 것은 부적절함. 출두요구를 할 때에는 명백한 출석 요구 사유와 질의 내용을 문서를 통해 요청하기를 바람".
감사원이 나에게 출석 요구를 하기 얼마 전까지 검찰은 배임혐의로 나를 수사하면서 6월 17일부터 7월 16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검찰에 출석하여 조사받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니까 검찰 소환과 감사원 출석 요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집중되고 있었다.
감사원은 KBS로부터 회신을 받자 바로 2차 출석 요구를 하라며 문서를 보냈다.
"출석요구를 하는 사유는 조직 및 인사 관리, 예산 편성 집행 등 한국방송공사 운영 전반에 대한 경영책임자의 견해 등 청취 정리. 출석 기한은 7월 24일 오전 10시".
사장 출두 요구, 38번 감사원 감사 중 한 번도 없었던 일
다음날인 7월 23일, KBS는 다시 이에 대한 회신을 보냈다.
"79년 이후 38차례 감사원 감사를 수감했으나 사장 출석 요구는 전례가 없음. 출석 요구 사유도 너무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지 않아 직접 출석해 답변할 사안이 무엇인지 불분명함. KBS에서 제출한 답변서를 충분히 검토하고 난 뒤 필요시 구체적 질문을 가지고 후속 조치를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 사장에 대한 직접 출석 조사는 재고해줄 것을 요청함."
7월 24일 감사원에서 3차 사장 출석 요구가 있었다. 7월 28일(월요일) 오전 10시까지 출석하라고 통보했다. KBS는 감사원 질문서에 대한 답변내용을 경영진이 검토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 요구을 수용할 수 없다고 답했다.
7월28일, 감사원에서 네번째 출석 요구가 왔다. 7월 31일(목) 오전 10시까지 불출석할 경우 출석 답변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최후통첩성 통보를 했다. KBS 내부에서는 감사원 출두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고발 조치 등 사장에게 불이익이 올 수 있으니 출석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견해를 달리 했다. 정치적 목적을 가진 표적 감사인데, 어떻게 그런 정치 표적 감사에 공영방송의 대표자가 순순히 응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실체파악이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서면 질의 등 다른 방식이 있는데, 굳이 사장더러 직접 출두하라는 것은 정치적 목적 외에 달리 설명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감사원의 KBS 감사 역사상 79년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인데, 내가 자진출두를 하면 수치스러운 역사를 만들게 되는 것이었다. 내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치적 목적을 가진 표적 감사인데 무슨 불이익인들 감당 못할까. 차라리 그 과정을 통해 감사원의 무리한 표적 감사의 행태를, 이를 뒤에서 지휘하는 정권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폭로시키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그렇게 여겼다.
7월 28일 감사원이 네 번째 나의 출석 요구를 하면서 이와 함께 감사원이 보낸 질문서 32건 가운데 21건이 답변 기한을 넘겼다며 7월 30일까지 제출하지 않으면 이 또한 답변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통보했다. 참 어이가 없었다. 본인의 진술도 듣지 않고 처벌하겠다고 다그치는 형국이었다. 당시 감사원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조급해 보였다.
사실 질문서 32건에 대한 답변서를 만드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제대로 된 답변서를 마련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특히 결과에 따라 관련자가 징계와 처벌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제대로 된 답변서가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실무진이 작성한 것을 팀장이 점검을 해야 하고, 이를 임원급이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하며, 또한 최종 책임이 있는 사장으로서 나의 내용 검토와 결재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것을 2~3일 안에 다 해치우라니, 이런 조급과 무리가...
우리는 이 최후통첩성 통보에 대해 다음 날 "충실한 자료를 작성하기 위해 답변서 제출 기한을 8월 5일까지 연기해 줄 것과, 사장 출석 답변 문제는 KBS가 제출하는 답변서를 받아 본 후 검토해줄 것"을 다시 요청했다. 그리고 사장의 출석 문제는 사장의 올림픽 출장(8월 6일~10일) 이후 검토해 보겠다고 답변했다. 사장의 출석 문제를 올림픽 출장 이후 검토해 보겠다고 답변한 데는 감사원의 속셈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 전후에 나의 해임을 강행하려 한다면 '올림픽 출장 이후 검토'는 감사원에서 바로 거부할 것으로 보았던 터였다.
아니다 다를까, 감사원은 올림픽 이후 출석은 곤란하니 주말이라도 출석을 하라는 것이었고, 장소는 감사원이 아닌 제3의 장소 또는 KBS도 무방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들의 의도는 뻔했다. 이미 결론은 다 나 있었으며, 그것을 올림픽 개막식 전에 해치우려 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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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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