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천일은 진다이 집단에게 죽은 북한 사람이 수만 명을 헤아린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자유주의적이거나 자본주의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사람은 진다이 집단에게 무차별로 학살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특히 해방 정국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한 사람은 모두 진다이의 테러 대상이었다. 그는 북한 정치 폭력배들의 맨 윗자리에 군림했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인철이 남한에서도 미국의 노선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수없이 빨갱이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고 말했다.
"빨갱이라고요?"
안동준은 빨갱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다고 했다. 그는 술이 조금 약한 듯했다. 그는 불쑥 조수경에게 물었다.
"조 총경님은 미국에 유학 갔다 오셨다지요?"
"유학이라기보다는 연수라고 해야 하겠지요."
"왜 남조선에는 미국 놈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거지요?"
안동준의 질문은 좌중의 분위기를 약간 긴장시켰다. 하지만 김인철은 부드러운 어조로 진지하게 답했다.
"물론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남한에서도 미군 주둔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들은 식민지 36년 간 일본 군대가 주둔했고 분단 60년 동안 미국 군대가 주둔해 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맞는 말 아닙니까?"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일본군과 미군은 다르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금 남한이 미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식민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미군이 주둔해 있는 국가와 국가 령은 150개 이상입니다. 거기에는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싱가포르,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포함됩니다. 이런 나라들을 식민지라고 말하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게다가 미군은 당사국이 원치 않으면 스스로 철수하기도 하는 유연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필리핀에서 미군이 철수한 것이 그 비근한 예입니다."
김인철은 중요한 문제는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의 자세가 당사국 국민들에게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그는 발언을 계속해 나갔다.
사실 남한은 경제 발전을 한답시고 소중한 것들을 너무 많이 잃었다. 국민들의 희생도 눈물겨웠다. 이승만 독재에 이어 군부독재가 30년 동안 국민을 탄압했다. 그러나 남한은 경제력이 세계 10위권대로 올라서면서 동시에 민주화를 달성해 가고 있다. 그러니 북한 인민들도 더 이상 남한을 옛날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미국이 한국에 간섭하고 한국인을 경시하는 것을 보면 피가 끓을 때도 있다. 그리고 한국에는 배금, 물신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공로 하나로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의 18년 독재를 오히려 예찬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남한에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천민자본주의 양상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한국은 민주화로 인해 탈바꿈하고 있다. 북한 인민들은 남한 민주주의가 지니는 저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2005년에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행사가 연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선노동당 창건 60돌, 조국광복 60년, 선군정치 10년차, 6·15공동선언 5주년 행사 등이다. 북한은 지금 내부적으로 선군정치의 사상과 노선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주민을 정신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김일성에 비해 주민 장악력이 떨어지는 김정일은 군을 우선으로 하는 선군정치를 선택해 물리력으로나마 군관민을 통솔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북한은 남한에 대해서는 민족 공조의 공세를 드높이고 있다. 민족 공조가 남북 화해와 평화 공존을 통해 21세기형 선진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하면 그처럼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 민족 공세 주장의 이면에는 남한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김인철은 말했다.
"저는 6·15선언 이후 북한 노동당 출판사에서 발간한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력사적인 6·15 북남공동선언 발표 이후 남조선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대하여'라는 긴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이것은 노동당 간부 및 군중을 상대로 한 강연 자료였습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친북련공세력이 반공보수세력에 비해 역량상 우세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도력에 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과거의 남조선에서는 북한을 지지했던 세력이 지하에 숨어 있던 일부 소수였는데 지금은 그 반대로 변했다고 했습니다. 덧붙이기를, 이 모든 변화는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께서 6·15 북남공동선언을 마련하시어 남조선에서 진보세력의 활동 공간을 넓혀 주시고 반공보수주의자들을 철저히 고립시킨 결과라고 했습니다."
김인철은 이런 자료는 북한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칭송하고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려는 목적에서 6·15선언 이후의 남한 정세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평가한 것이라고 말하며 최종적인 발언을 추가했다.
여기에서 북한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남한 사회에서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진상이다. 6·15선언 이후 남북은 대립·갈등에서 벗어나 화해·협력으로 나아가자는 약속을 실행하고 있다. 개성공단이 건설되었고 그곳에서 상품이 출하되었다. 이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발전하고 있는 남북관계가 진정성을 갖추려면 남·북한이 서로의 사정을 바르게 알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남한에서는 민주주의가 심화되면서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북한을 바로 알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남한 사람들은 각종 매체를 통하여 북한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활발하고도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거기에는 친북적 시각도, 반북적 시각도, 제3의 시각도 있을 수 있다. 남한 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다양한 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북한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비로소 북조선도 시대에 맞는 체제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버릇없이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김인철의 말을 진지하게 들은 안동준에게도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아까 미국 놈이라는 거친 말을 써서 미안합니다. 제가 보기에 남조선 인민들은 우리 공화국이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로 깔보고 있지는 않나 느껴질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생각으로는 제국주의에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남조선이 왜 한사코 미국을 추종하는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우리는 남조선 인민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합니다. 동구권 사회주의가 모두 몰락했어도 우리는 독립국가 체제를 강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소련의 위성국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미국과 전쟁해서 살아남은 나라가 몇이나 됩니까? 베트남이 미국에게 이긴 유일한 나라라면 우리는 미국과 비긴 유일한 나라입니다.
여러분도 보셨듯이, 우리나라 대동강에는 미국의 프에블로라는 이름의 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자업자득이었습니다. 국제법을 무시한 채 우리를 얕보고 임의로 정찰하다가 당한 것입니다. 그 당시 승무원 석방 교섭을 했던 미국 대통령 존슨도'북한은 소련의 말도 안 먹히는 이상한 나라'라고 실토했다지 않습니까?
그만큼 우리에게는 주체적 도덕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미국이 두려워하는 무기도 있습니다. 제국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만큼 견딘 나라가 과연 인류 역사에 어디 있었습니까? 물론 남조선이 경제 발전을 이루면서 민주화에 성공한 근래의 역사도 세계사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저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안동준의 말에 의하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북한을 악마로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북한의 수령제, 즉 김일성, 김정일의 우상화에 초점을 맞춰 비난한다. 3만 개나 넘는 김일성 동상과 상징물은 무엇이며 평양의 주체탑은 왜 그리도 높으냐고 비웃는다. 그리고 지금 시대에 부자 권력 세습이 다 뭔가? 라며 혀를 차고는 한다.
좋다. 그러나 우리라고 개인 우상화와 부자 세습을 마냥 찬양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 달라. 그것은 제국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주체적으로 60년 동안 국가를 유지해 왔다. 그러므로 수령제나 선군정치를 과거의 전체주의 체제라고만 볼 수는 없지 않느냐? 소련의 스탈린이나 중국의 모택동 시절을 상기해 보라. 그것은 권력체제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체제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보지 않고 우리를 비난만 한다면 우리에게는 할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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