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세 번씩, 세 끼 식사시간에 맞춰 자동차로 5분 거리인 요양병원을 가서 노친 돌보는 일을 중심으로 내 일상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30일, 노친을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 서해안요양병원으로 옮겨 모신 이후 처음 한동안은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다니다가 12월 겨울방학이 시작된 날부터 하루 세 번씩 다니다 보니 이제는 완전히 관성이 붙었다.
노친은 내게 미안한 표정이기도 하고, 너무 자주 오지 말라는 말씀도 하시지만 내심으로는 늘 기다리시는 눈치다. 나로서는 아침 7시 30분, 오전 11시 30분, 오후 4시 30분 요양병원 식사시간에 맞춰 10분전쯤 출발을 하지만, 간혹 좀 늦기라도 할 때는 노친이 간병사에게 전화 좀 해달라고 부탁도 하신다고 한다.
이미 다른 글에서도 적은 얘기지만, 때로는 노친이 기저귀에 용변 보는 것을 참고 있다가 내가 병원에 도착하거나 머무르는 시간에 화장실 가기를 원하시는 경우도 있다. 휠체어에 태워 화장실로 모시고 가서 변기에 앉혀 드리고 용변을 보시게 한 다음 뒤처리를 해드린 일이 많다.
병원에 가는 즉시 '바이오 기공수'라는 '에너지 물'을 드리고, 변비 예방에 좋다는 '쪄서 말린 살구'부터 드린다. 의치를 끼워 드리고, 식사를 도와 드리고, 의치를 빼어 씻어서 소독약물 상자 안에 넣고, 병원 약을 복용시켜 드린 다음에는 등 긁어드리기와 안마와 지압, 팔과 다리 주물러 드리기를 한다. 병상에 옆으로 뉘고, 암세포 영향으로 골절된 왼쪽 골반 뼈 부위 엉덩이를 살살 두드려 드리고, 요즘 들어 통증을 많이 느끼시는 무릎을 집중적으로 만져 드린다.
노친은 미안한 나머지 "아배가 너무 힘들어. 그만 혀"라고도 하시지만, 되우 시원해하시면서 때로는 스르르 잠이 들기도 한다.
어제(28일/목)는 또 한번 수원의 아주대학교를 갔다 왔다. 그 일로 점심때는 요양병원에 갈 수 없게 되어 이삼일 전부터 노친께 설명을 드리고, 당번 간병사에게도 미리 단단히 부탁을 해놓았다. 지난해 11월 중순경부터 매주 목요일 수원 아주대를 가다가 올해부터는 2주에 한 번씩 간다. 그 대학의 한 분 교수님이 개발하여 임상 실험중인 '회전전자파 광합성 녹말'을 얻어오는 일이다.
플라스틱 작은 용기에 들어 있는 50cc 녹말 물을 3/1씩 1.8리터 물병 세 개에 섞어 하루에 두세 컵씩 공복에 드시게 한다. 암세포의 진행을 저지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나도 그것을 믿고 기대하면서 노친께 드리는데, 노친이 골수에까지 암세포가 퍼진 상태에서도 크게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것은 진통제 효과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가을 '바이오 기공수기'라는 것도 알게 되어 구입했다. 회전전자파를 방출하는 작은 기계인데, 그 기계 위에 2리터 플라스틱 물병을 올려놓고 4시간 정도 경과하면 임산부 자궁 속의 양수와 똑같은 성격의 물로 변한다고 한다. 직접 계란으로 실험을 해보았다. 보통 수돗물 컵에 넣은 계란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풀어지고, 정수기물 컵에 넣은 계란도 하루 정도 지나면 풀어지는데, 바이오 기공수 컵에 넣은 계란은 일주일이 지나도 그대로인 것이었다.
성인병을 안고 사는 우리 부부도 그 물을 일상적으로 마시는데, 얼굴과 손발의 피부가 매끄러워진 것을 느낀다. 노친도 얼굴을 보면 전혀 병색이 아니다. 화사하기까지 한 안색이어서, 내가 더욱 희망을 갖는다.
노친은 지난해 6월 말기 폐암 진단을 받은 후부터 매일같이 많은 양의 약을 드신다. 나는 약이라는 게 양날의 칼임을 잘 알고 있다. 체내에 약의 독도 많이 쌓일 것을 생각하고, 그 독을 해소하는데는 웅담이 좋을 것으로 믿고, 그동안 노친께 웅담도 계속 드려왔다.
지난해 11월 중순쯤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노친은 거의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30년 동안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해온 이경식 박사도 내 노친의 임종이 임박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노친은 소생했고, 점차 상태가 좋아져서 11월 30일 집 근처 요양병원으로 옮겨오실 수 있었다.
요양병원 원장님은 내게 "노친을 회복시키기 위해 입원시킨 것은 아니지요?"라고 했다. 회복이 목적이 아니고, 별 고통 없이 여생을 사시다가 잘 돌아가시게 해드리는 것이 목적임을 내게 주지시킨 것이었다.
그 사실에 동의했다. 그랬으면서도 나는 노친을 회복시켜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 비록 끝내 회복시켜 드리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함으로써 스스로 여한을 남기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노친으로 하여금 자식에 대해 조금도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눈을 감으시게 하려는 뜻이기도 하다.
노친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면서 때로는 과연 이게 잘하는 일일까 하는 묘한 회의에 젖기도 한다. 전혀 거동을 하지 못하고 병상에서만 사시는 처지인데, 노친을 더욱 오래 고생시켜 드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쯤에서 내가 공들이고 있는 일들을 줄이거나 중단하고, 노친을 좀더 일찍 '보내드리는' 것이 오히려 노친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내 의식의 언저리를 배회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얼굴을 젓고 더욱 힘을 낸다. 언제 끝이 나고, 어떤 형태로 끝을 보게 될지는 모르지만, 끝까지 올곧은 마음과 정성으로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한다. 올해 87세이신 노친께서 기적적으로 다시 걷게 되시든, 병상생활을 지속하시든, 언젠가는 끝이 오게 될 터인즉,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함으로써 노친께 기쁨과 위안과 고마움을 안겨 드리고, 노친이 그런 마음을 안고 이승을 떠나시도록 해드리려는 뜻인 것이다.
<3>
하루에 세 번 노친 병실에 가서 머무르는 시간, 내색하지는 않지만 깊은 슬픔을 감내하는 때도 있다. 왜 인생의 마지막은 이런 모습이어야 하는가? 세상 모든 사람의 말년이 똑같지는 않겠지만, 요양병원 노인들의 모습에서는 인생 말년의 공통성 같은 것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다. 노인들의 모습에서 미래의 내 모습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일 터이다.
나도 이제 환갑을 넘긴 나이이니 인생 말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셈이다. 미래의 말년은 어느새 순식간에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것을 생각하면 병실 노인들을 좀더 측은지심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 같다.
같은 병실 예닐곱 명 할머니들 사이에도 약간씩 다른 신체적 조건이 공존한다. 보조기구를 이용하여 자기 발로 화장실 정도는 다닐 수 있는 할머니들도 있고, 자기 힘으로는 병상에서 일어설 수조차 없는 할머니들도 있다. 자기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더라도, 내 노친처럼 휠체어로 이동되어 화장실 변기에 앉아 변을 볼 수 있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간병사가 노상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노인도 있다.
누가 부담하든지 간에 월 70만원의 입원비를 내고 요양병원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은 똑같지만, 내 노친처럼 가족이 매일같이 그것도 하루 세 번씩 병실을 찾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내가 두 달 동안 병원을 다니면서도 가족을 고작 한두 번 보았을 뿐인 노인도 있다.
내 노친의 앞 병상 할머니들 중에는 '울보' 할머니도 있다. 내가 노친의 몸을 주물러 드리는 것을 보며 눈물짓는 것을 본 적이 있다(아니, 여러 번이다). 그 할머니께 여간 미안하지 않다. 어머니 몸을 살펴 드리면서 미묘한 갈등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다고 노친 돌보는 일을 접을 수도 없고, 참 난감해진다.
(그 할머니의 등이라도 좀 두드려 드릴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지만, 다른 할머니들도 생각해야 할 것 같고…. 쉬운 일이 아니지 싶다.)
자기 발로 거동이 가능한 한 할머니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고 한다. 부럽기도 하면서 이상하게 즐거워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고맙다는 말씀도 하신다.
그 할머니로부터 처음 '고맙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매우 색다른 감사 표시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내가 처음 접해본 특이한 유형의 감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절로 들었다. 또 그때부터 내게도 감사해야 일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깊이 되새길 수 있었다.
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요양병원이 있는 것도 고맙다. 의료보험 제도도 고맙고, 내 노친과 특별한 관련을 맺고 있는 요양병원 의료진과 간병사들도 고맙다. 내가 하루 세 번씩 요양병원을 갈 수 있는 '자유직업인'이라는 사실도 고맙다. 비록 잘 나가는 유명 작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무명은 면해서 내 의료비와 용돈 정도는 충당할 수 있도록 원고료 수입이 있는 것도 여간 다행이 아니다.
요양병원의 노친을 돌보는 일에도 부창부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내도 고맙고, 방학을 맞아 집에 와 있는 동안에는 매일 한두 번씩 아빠와 동행해 주는 대학생 아이들도 고맙다. 내가 늦게 혼인하여 이제 대학생인 아이들을 둔 것도 여간 다행이 아니다. 아빠와 무수히 동행한 덕에 아들 녀석은 자동차 운전을 거의 익혔다.
매주 일요일이면 대전에서 오는 막내 동생도 고맙고, 한 주 걸러 한 번씩 친정을 찾는 안양 누님과 안산 누이동생도 고맙고, 미국에서 수시로 전화로 메일로 노친 상태를 묻는 두 누이도 고맙다. 많은 친척과 친지들, 또 성당 가족들이 병실을 찾는데, 고마움과 함께 미안한 마음도 한량없다.
병실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미래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는 이도 있다. 어떤 모습이 되든지 간에 우리 모두에게는 '말년'이 있다. 인생 말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또 순식간에 닥쳐온다. 사람은 말년을 잘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고향'을 많이 생각해야 한다. 이승을 떠난다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돌아갈 고향이 있다. 고향에서 왔으니 고향으로 가는 것이다.
비록 병고에 시달리는 몸일망정 마음만은 슬프지 않게, 기쁘고 편안한 마음으로 말년을 살며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잘 하도록 해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요 본분일 것이다. 그래야 나도 훗날 기쁘고 편안한 마음으로 고향 갈 준비를 잘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런 평범한 이치를 헤아리며 오늘도 지레 고향 길을 닦는 마음으로 노친이 계신 요양병원을 간다. 요양병원을 오가는 찻길 위로도 세월은 하염없이 흐른다.
2010.01.29 17:36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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