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전 가족사진을 들고 떠나는 추억여행

우리 집 역사(歷史)요, 소중한 기록인 빛바랜 사진들

등록 2010.01.30 17:24수정 2010.01.30 17:2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래는 1957년 봄에 촬영한 필자의 가족사진이다. 어른들 말을 빌리면 사진관에서 찍은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사진이란다. 지금은 사라졌는데, 군산에서 가장 번화했던 영동 상가건물 2층 사진관에서 찍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a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1957년)에 찍은 가족사진. 이 사진을 찍고 아버지는 9년 후에, 어머니는 39년 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1957년)에 찍은 가족사진. 이 사진을 찍고 아버지는 9년 후에, 어머니는 39년 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 조종안


'참 오래됐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아버지가 쉰여덟, 어머니가 마흔여섯, 필자가 여덟 살이었는데 두 분은 돌아가시고 나는 환갑(還甲)이 됐으니까 말이다. 거울 앞에서 옷매무시를 고치며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던 어머니와 누님들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허풍쟁이 아저씨가 전쟁영화를 보고 와서 "나왔던 배우들이 거지반 총 맞고 죽어가꼬 내일은 재미없을 꺼여!"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고, '독사진'보다 여럿이 찍는 '단체사진'이 비싸다고 믿는 아주머니들이 상당하던 시절 사진이라서 더욱 정겹다.

뒷줄 좌측에서 시계방향으로 큰 누님(78세), 둘째 누님(76세), 셋째 누님(70세), 형님(68세), 막내 누님(65세), 필자(61세), 아버지, 어머니, 귀엽게 생긴 꼬마가 올해 쉰일곱 되는 막내이다. "나는 사진만 찍을라믄 왜 그렇게 고개가 틀어지는지 몰라!"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큰 누님 목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듯하다.

사진관에 들어서니까 모든 게 흥미롭고 신기했다. 비도 오지 않는데, 여기저기에 우산이 펼쳐 있어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조명시설이었다. 꿈에서도 못 보던 아름다운 배경은 실제 존재하는 도시를 그린 것으로 알았고, 주름 막이 길게 앞으로 나온 카메라는 요술 상자를 겹겹이 쌓은 탑처럼 보였다.

"자, 여기 보세요, 찍습니다!" 소리와 함께 넓적한 집게 같은 것을 쥐고 있던 사진사 아저씨 오른손이 올라가면서 마그네슘이 터지는 '펑!' 소리에 놀라던 그 순간을 어떻게 잊겠는가. 버섯처럼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는 새벽녘에 산등성이를 지르밟는 운해(雲海)처럼 천정을 덮어나갔다.


모표가 달린 교모를 쓰고 아버지 옆에 앉아 있는 필자의 가슴에 이름표가 붙어 있고, 단추 다섯 개 모두 달려 있어 안정감을 준다. 단추가 하나 둘은 보통이고, 서너 개씩 떨어진 교복을 입고 가족사진을 찍는 아이가 부지기수였던 시절이었으니까.

삼발이 위에 사진기를 받친 사진사가 검은 천을 둘러쓰고 사진기를 조절하는 동안 나는 긴장되어 있었다. 아니 비장해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입술을 꼭 다물고 놀란 토끼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돌격명령이 두려운 겁 많은 군인처럼.


모자가 약간 위로 올라갔는데 사진사 아저씨 명령을 충실히 따른 것 같다. 교복 소매가 손등까지 내려온 것을 보면, 양키시장에 있던 '송도사'(맞춤교복 단골집) 주인에게 어머니가 "애들은 비오고 나서 고사리 크듯 헝게, 소매가 넉넉혀야 헐꺼요!"라며 단단히 부탁한 모양이다. 

머리를 예쁘게 깎은 동생을 보면 기억하기 싫은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나는 항상 까까머리여서 여름에는 피곤한 파리들의 쉼터가 되었다. 그래서 동생처럼 3부로 깎고 싶었다. 그러나 왕고집이셨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아 학창시절 내내 까까머리로 지내면서 얼마나 고역을 치렀는지 모른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막내 누님과 나는 당시 메이커였던 '만월'표 검정 고무신 차림인데 잃어버리기 일쑤여서 부젓가락을 달구어 안쪽에 점을 찍거나 한 일자를 그어서 신고 다녔다. 눈이 많이 내리면 새끼줄로 묶고 다니고, 땀이 많이 나는 여름에 달리기 할 때는 고무신을 벗어 양손에 쥐고 죽으라고 뛰던 그때가 엊그제 같다.

전쟁의 상흔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던 50년대 후반, 당시 아이들에게 사진 촬영은 꿈이자 큰 행사였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이 담긴 누렇게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은 소중한 기록이자 추억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티켓이라 할 수 있겠다.

어머니, 아버지 독사진

a  아버지, 어머니 독사진. 당시 아버지는 쉰여덟, 어머니는 마흔여섯 살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필자보다 어머니는 아내보다 나이 들어 보인다. 부모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독사진. 당시 아버지는 쉰여덟, 어머니는 마흔여섯 살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필자보다 어머니는 아내보다 나이 들어 보인다. 부모이기 때문일 것이다. ⓒ 조종안


가족사진 촬영을 마치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독사진을 찍은 걸 보면 영정사진으로 사용하려고 작심하고 사진관에 갔던 것 같다. 이렇게 찍은 사진은 안방 벽에 걸린 사진액자 상단을 20년 넘게 지키다 집을 개축하면서 형님 앨범으로 모셔졌다.

황해도 해주에서 삼대독자로 태어나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 아버지(1900년)는 일찍 고향을 떠나 청년기를 만주에서 보내고 20대 후반에 군산에 정착했다. 그 후 장삿배 선장이 되어 어선과 상선이 드나드는 포구와 항구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어머니(1912년)는 남동생 하나에 오빠가 넷인 외동딸이었는데 아버지와 인연을 맺게 된 내력이 흥미롭다. 아버지가 선장이 되어 지금은 계화간척지 쌀로 유명한 계화도에 드나들다가 외삼촌들 눈에 들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어머니 사진 속에는 80여 년 전 계화도 섬마을 외갓집 동네가 담겨 있는 듯한데, 외삼촌들이 얼마나 좋게 보았으면 고향도 불확실한 '떠꺼머리총각'이던 아버지에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결혼을 허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미소가 지어진다.

a  아버지 어머니의 신혼 때 모습. 어머니에게 배가 나왔다고 놀리면 “나도 젊었을 때는 늘씬 혔다!”며 웃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아버지 어머니의 신혼 때 모습. 어머니에게 배가 나왔다고 놀리면 “나도 젊었을 때는 늘씬 혔다!”며 웃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 조종안

그렇게 맺어진 신혼부부는 1930년대 초 군산에 정착해서 4남 5녀를 두었고,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금실이 좋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싸우시는 걸 못 봤으니까. 그런데 큰아들은 여섯 살 때, 막내딸은 세 살 때 잃고 남은 7남매 모두 지금까지 살아 있으며 그 속에 내가 끼어 있으니 축복이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어머니는 허름한 셋방에서 모주와 떡장수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고 한다. 피죽으로 허기를 달래며 자식을 낳아 기르다 해방 후에는 과일장수와 물장수, 쌀장수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논도 사고 집도 넓혀갔던 어머니. 그는 그렇게 고생하며 모은 재산을 몽땅 남에게 떼이고도 송사를 벌이거나 말다툼 한 번 하지 않으며 '여걸' 소리를 듣고 살았다. "져주면서 살믄 맘이 편허다!"면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여흥 민(閔)'씨였던 어머니는 한글도 깨우치지 못했다. 그러나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이름과 속담을 줄줄이 꿰었다. 조선 5백년 역사에서 민(閔)씨 성을 가진 중전이 셋 있었다는 것과 장희빈에게 쫓겨난 인현왕후와 명성황후가 얼마나 억울하게 당했는지도 얘기해주었고, 장희빈을 빗대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미나리는 사철~ 장다리는 한철~' 노래도 부를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래된 노래를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 배웠다며 섬(계화도)으로 공부하러 들어온 유학자들도 얘기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붕당정치가 절정에 달했던 조선 19대 임금 숙종(1674~1720) 때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가 고종이 승하했던 1919년을 전후해서도 불렸다는 얘기가 되는데 좀 더 조사해볼 일이다.

반세기가 넘은 부모님 사진을 보며 지난날들을 성찰하고 반추하며 음미한다는 것은 신이 내려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53년이 지나는 동안 유명을 달리한 부모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즐겁기 때문이다.

확실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이 사진을 촬영하는 날 집 분위기는 어지간한 잔칫날 못지않을 정도로 흥겨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출가한 누님들까지 가족이 다 모였고, 특히 열일곱 살에 직업군인과 결혼해서 경기도 의정부에서 살던 둘째 누님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특급열차를 이용해도 서울에서 군산까지 한나절이 넘게 걸리던 시절이었으니까.

출가한 누님 둘이 빠진 5남매 사진

아래는 출가한 두 누님을 뺀 5남매 사진이다. 가운데 흉측한 상처는 반세기 넘게 지나는 동안 형제들이 겪은 애환을 말해주는 듯한데, 셋째 누님이 뒷면에 써놓은 '4291년 3월,5일 토요일'이 국전에 출품한 낙관 글씨보다 멋있게 보여 복사해서 붙여놓았다.

a  5남매 사진. 뒤에 서 있는 셋째 누님은 이 사진을 찍고 1년 후에 결혼하고, 이어서 세일러복을 입은 막내 누님이 스무 살이 넘도록 밥을 해먹다가 결혼해서 가끔은 미안한 생각이 든다.

5남매 사진. 뒤에 서 있는 셋째 누님은 이 사진을 찍고 1년 후에 결혼하고, 이어서 세일러복을 입은 막내 누님이 스무 살이 넘도록 밥을 해먹다가 결혼해서 가끔은 미안한 생각이 든다. ⓒ 조종안


이때는 한글을 깨우치기 시작할 무렵이어서 학교생활도, 등하굣길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친구들과 거리를 오가며 벌이는 간판 글씨 읽기시합과 두 자리 숫자 덧셈과 뺄셈이 요술방망이처럼 신기하고 재미있었으니까.

사진을 찍던 해(1958년)에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막내 누님은 1959년 가을에 결혼한 셋째 누님을 이어받아 졸업과 동시에 밥을 해먹었는데 살림꾼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결혼을 해서는 어려운 자들의 고뇌를 혼자 떠안은 목회자처럼 삶이 순탄하지 못했다.

육십대 중반으로 접어든 막내 누님(65세)은 3-4년 사이에 유방암과 자궁암 수술을 연거푸 받았다. 그러나 남편의 정성어린 보살핌과 정신력으로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버텨내고,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데 경과가 좋다고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지금은 교직에서 정년퇴직한 매형과 조용하고 아담한 단독주택에서 의미 있는 노년을 보내는 막내 누님. 주말이면 큰 며느리와 작은 며느리가 아이들을 앞세우고 찾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가는데 한꺼번에 오면 복잡하고 힘드니까 교대로 오라고 했다고.

당시엔 중학생이던 형님도 이제는 칠순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집이 구시장(공설시장) 부근이어서 값을 잘 쳐주겠다는 부동산업자들이 많았는데, 살기 편리한 아파트로 이사하자는 형수님의 끈질긴 권유에도 부모가 물려준 고향집을 57년째 지키는 형님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7남매 중 처음으로 초등학교를 마치고 상급학교에 진학했던 형님은 누님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다. 특히 큰 누님이 골목 모퉁이에 있던 가게에서 만년필을 사주는 모습과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 민요와 가요를 부르는 형님을 보며 부러워하던 기억이 새롭다.

형님은 보험설계사 일을 10년 넘게 하고 있는데, 인심을 잃지 않아서인지 멀리서도 도와주는 지인들이 많다고.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결혼사진이 없는 게 한이 되겠지만, 동갑인 형수와 직장에 다니는 큰 사위, 중령 진급을 앞둔 큰아들, 사업을 하는 작은아들에게서 손자 손녀를 여섯이나 보았으니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흑백사진 한 장에는 책 한 권 분량이 넘는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머니와 동네 어른들에게 세월이 너무 빠르다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들었다. 하지만 그런가 보다 했다. 나이를 먹고 늙는 것은 어른들이나 하는 탄식쯤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환갑이라니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모든 게 부족했지만, 순서가 있었고, 우애가 있었고, 이웃 간에 따뜻한 정이 오가던 시절의 가족사진은 유형과 구도가 빼닮았다. 왜 그럴까? 암실에서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판에 박힌 듯한 '사진관 사진'은 동시대인의 동질감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도 한다. 빛바랜 사진을 보며 '그때는 다 그랬지' 하듯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와 '한겨레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와 '한겨레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가족사진 #부모사진 #추억여행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3. 3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4. 4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5. 5 '바지락·굴' 하면 여기였는데... "엄청 많았어유, 천지였쥬" '바지락·굴' 하면 여기였는데... "엄청 많았어유, 천지였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