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샛골목 섬돌로 쓰이는 '일본 절 빗돌' 하나.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이런 돌이 무척 많았습니다. 이제부터 이런 '일본 절 빗돌' 자취도 하나하나 찾아보아야겠다고 느낍니다.
최종규
인천에서 문화해설사 일을 하고 있는 장회숙 선생님한테 말씀을 여쭈며 이 골목으로 다시 찾아와 봅니다. 문화해설사 장회숙 선생님은 이런 돌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세운 절(아마도 '신사'일 테지요)에서 쓰던 돌일 텐데, 해방 뒤 한국전쟁 때 폭탄 맞고 부서진 절에서 흩어진 조각들을 동네사람들이 가져다가 쓰면서 이렇게 자리를 잡고 있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니까, 이르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면서 사람들이 '신사를 때려부수었다'면 그때부터 이렇게 굴러와서 박힌 돌인 셈이고, 한국전쟁 때 미군이 월미도 앞바다에서 함포사격을 하며 인천상륙작전을 할 때에 부서진 절에서 뒹굴던 돌을 전쟁이 끝난 다음 동네를 새로 짓고 고칠 때에 동네사람들이 하나둘 주워 와서 쓴 셈입니다.
이 얘기를 듣고 나서, 골목마실을 할 때에 섬돌과 주춧돌을 곰곰이 살펴봅니다. 곰곰이 살펴보니 그동안 '저 돌은 그냥 시멘트나 여느 돌은 아니네'하고 느끼던 돌이 하나같이 '일제강점기 일본 절에서 쓰던 돌'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삶터에 아픈 생채기를 굵직하게 남긴 일본사람 발자취가 이렇게 골목집마다 구석구석 되쓰이면서 '눈에 거의 안 뜨이는 자리'에서 말없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노릇이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 돌들은 '문화재'라는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인천 중구 중국인거리 둘레는 '개항 역사를 말하는 문화거리'로 지정되어 옛 일본집을 허물지 않을 뿐더러 새옷을 입히거나 손질을 하지만, 이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이 전쟁 끄트머리에 동네를 되살리면서 흘린 땀방울이 서린 발자취들은 그냥 '재개발 대상'이요, '재개발 확정 경축'이라는 외침말에 따라 하루아침에 사라지면 그만인 낡은 모습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