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노년? 글쎄, 늙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연극 속의 노년(21) : <낮잠>

등록 2010.02.04 09:51수정 2010.02.0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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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사에는 연극의 줄거리가 들어 있습니다.

 

노인1.

당뇨에 심근경색에 요실금이 있어 기저귀를 사용해야 하는 남자 '영진'. 30년 전에 떠났던 고향에 돌아온다. 고향 마을에 세워진 노인요양원으로의 귀향이다. 뻑하면 옷에 소변을 지리고, 요양원 생활에 적응은 되지 않고, 그러니 침대에 누워있기 일쑤이고 낮잠으로 소일한다.

 

노인2.

할머니가 되어도 여전히 예쁘다. 여성스럽고 잘 웃고 상냥하다. 그런데 그 놈의 기억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한다. 여고시절엔 뭇 남학생들의 가슴을 흔들었던 미모의 문학소녀였지만, 인생이 시처럼 그렇게 풀리진 않았다. '이선'은 치매 환자로 요양원에서 살고 있다. 

 

노인3.

변죽 좋고 목소리 크고 세상에 무서울 것도 거리낄 것도 없다. 세상만사 모르는 것도 없고 온갖 소문을 줄줄 꿰고 있다. 다만 돈이 없는 게 흠. '동필'은 늙어서도 여전히 재활용품을 모아 팔며 요양원에 얹혀 산다.   

 

이런 데도 아름다운 노년, 행복한 노년, 성공적인 노화, 노년의 즐거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릴 사람 과연 그 누구인가? 이런 데도 늙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나는 결코 두럽지 않다고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댈 사람 과연 누구인가? 

 

a 연극 <낮잠> 포스터

연극 <낮잠> 포스터 ⓒ (주)엠뮤지컬컴퍼니

▲ 연극 <낮잠> 포스터 ⓒ (주)엠뮤지컬컴퍼니

연극 <낮잠>은 노인요양원에 모이게 된 세 명의 고향 친구 이야기다. 남학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이선은 이제 치매에 걸려 고향 친구의 얼굴조차 기억해내지 못하지만, 영진에게 이선은 여전히 첫사랑의 소녀다. 

 

오래 전에 잊은 줄 알았던 첫사랑을 눈 앞에서 다시 보자 가슴은 옛날처럼 뛰기 시작하고, 요양원 생활은 당연히 활기를 띠게 된다. 노인인 영진 앞에 고교 시절의 영진이 나타나 이번에는 그녀를 놓치지 말고 잡으라고 용기를 북돋워준다. 숫기 없어 말 한 마디 건네보지 못한 소년 영진이 같은 후회를 하지 말라고 노인 영진을 격려하는 셈이다.

 

이선과 시간을 함께 하면서 새 생활을 꿈꾸지만 두 사람 곁에는 동필이 있다. 이선은 동필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재미있어 하며 친근하게 느낀다. 그러니 고등학교 동창인 영진과 동필은 티격태격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그러던 중에 요양원에 낸 보증금에 눈독을 들인 이선의 사위가 이선을 퇴소시키려 하고, 이에 맞서 영진과 동필은 모처럼 한마음이 되어 지혜를 모은다. 그것은 바로 이선의 사위에게 보증금을 줘버리고 영진과 이선이 서류상 부부가 되는 것. 그러면 이선은 계속해서 요양원에 머물 수 있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계획대로 되긴 했으나, 건강하던 동필이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시 한 구절의 앞 뒤 순서를 가지고도 서로 양보는커녕 악착같이 싸우고, 눈엣 가시마냥 으르렁대더니 불시에 닥쳐온 죽음 앞에서는 그저 목놓아 울 뿐이다. 

 

첫사랑, 우정, 요양원, 건강, 죽음... 노년에 이르러 겪어내야만 하는 이 모든 것에 더해 노인 영진이 소년 영진과 마주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거울 앞에 서서 나이 들어 늙은 내가 젊어 새파란 나를 마주 바라보는 것.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무엇을 말하고 듣게 될까.

 

소년 영진이 어느 순간 외친다. 내가 너인 것이 싫다고. 그것은 바로 내가 나인 것이 싫다는 뜻. 그러나 시간이 흘러 소년 영진은 다시 말한다. 내가 나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이것은 당뇨에 심근경색에 요실금에 시달리면서 쩨쩨하게 작은 일에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에 대한 자랑이 아닌, 긴 세월 주어진 삶을 '살아낸' 것에 대한 칭찬이며 대견함이 아니었을까. 

 

a 연극 <낮잠> 공연 안내판 앞에서

연극 <낮잠> 공연 안내판 앞에서 ⓒ (주)엠뮤지컬컴퍼니

▲ 연극 <낮잠> 공연 안내판 앞에서 ⓒ (주)엠뮤지컬컴퍼니

 

한바탕 '낮잠' 같을지도 모를 인생길의 끝에 이르렀을 때 나는 내가 나인 것이 진정 좋을까, 아님 싫을까.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될까, 아니면 그만 하면 됐다고 잘 살았노라고 나를 안아주게 될까... 역시 살아봐야 알겠지.

덧붙이는 글 | 연극 <낮잠> - 감독, 무대로 오다 시리즈 2탄 (연출 허진호 / 원작 박민규 / 출연 이영하, 김창완, 오광록, 서지영, 이항나, 김기범 등) - 3월 28일까지, 백암아트홀 

2010.02.04 09:51ⓒ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연극 <낮잠> - 감독, 무대로 오다 시리즈 2탄 (연출 허진호 / 원작 박민규 / 출연 이영하, 김창완, 오광록, 서지영, 이항나, 김기범 등) - 3월 28일까지, 백암아트홀 
#낮잠 #허진호 #노년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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