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02.04 11:31수정 2010.02.04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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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무진', 그를 만난 건 2002년 8월 어느 날. 그러고 보니 그날이 그의 생일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러 몇 년 식이라고 한다지 아마. 암튼 지나와서 말이지만, 그를 만난 건 우리 가족의 크나큰 행운이었다.
리무진을 만나게 된 사연
2002년 7월 어느 날, 우리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 교회(그 땐 교회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에다가 승합차를 하나 사드리고 싶은데요."
"아니, 왜요?"
"목사님이 평소 타고 다니시던 승합차가 너무 낡아 보여서 늘 마음이 쓰였거든요."
참 뜬금없었다. 동생으로부터 그저 물려받았던 승합차가 아주 낡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평소 아주 친분 있게 지내는 여성도 아니고, 더군다나 우리 교회에 나오는 여성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시골 마을에 사는 이웃집 아줌마였다. 물론 그 여성도 다른 교회에 나가는 집사님으로 통하긴 했지만.
그 전화 받고 조금은 황당했지만, 솔직히 좋았다. 그때까지 살면서 우리 가족이름으로 구입한 승용차는커녕 승합차도 없이 살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말했다.
"집사님, 남편과 상의해보셨나요? 며칠 동안 고민해보고 그 때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시면 전화 다시 한 번 주세요."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마음에 변화가 없다며 우리 집으로 그 여성이 찾아 왔다. 그래서 나는 덥석 또 한 번의 요구를 했다.
"집사님, 그럼 이왕 사주실 김에 12인승보다 15인승으로 사주셔요. 그러면 그 차로 일죽 지역에 봉사하는데 더 도움이 될 거 같아요."
나도 '간댕이'가 부었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요구를 했는지 모르겠다. 평소 내 성품으로는 오버 중 오버였다. 12인승이나 15인승의 가격 차이가 그리 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그를 만나게 되었다. 생전 처음 그를 넘겨받게 되던 날, 참으로 좋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차량등록증에 찍힌 내 이름 석 자가 신기하기만 했다. 시골 마을 한 바퀴를 시승을 하면서 아내와 나는 그저 좋았다.
리무진의 대 활약상
그 후로 그는 참으로 대단한 활약을 했다. 우리 '더아모의집(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모임의 집'이 일죽에서 뜨는(?)데 기여했다.
그 여성분과의 약속을 지켰다. 우선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차량봉사'를 하겠으니 연락만 해 달라. 기름만 넣어주시면 언제든지 달려가겠다"는 내용을 써서 종이에다가 코팅하여 마을에 돌렸다. 그리고 일죽면 지역 교회들과 다른 마을 어르신들에게도 돌렸다.
처음엔 반신반의 하던 분들이 그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마을 야유회 때, 마을 사람 병문안 때, 마을 사람 결혼식 때, 마을 사람 초상 때, 다른 교회 야유회 때, 다른 교회 어린이집 수련회 때 등등. 심지어 기사인 나를 제외하고 리무진만 빌려준 적도 많았다.
물론 우리 '더아모의집'도 유감없이 이용했다. 독거노인 목욕 봉사, 독거노인 반찬 배달, '더아모의집' 야유회 등. 그리고 우리 가족의 개인 자가용 노릇까지.
무엇보다도 신나는 건 리무진 덕분에 실시한 '리무진 타고 무작정 떠나기'였다. '더아모의집' 청소년들(그들은 마을 아이들이었다)과 함께 리무진을 타고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떠나는 거였다. 어디로 갈지는 그날 탄 청소년들이 정하는 거였다. 그냥 어디론가 가다가 거기에 내리고 싶으면 내리고, 또 다시 타서 가고. 그게 다였다. 지나고 나서도 그 프로그램(청소년들 스스로 착안해 낸)은 참으로 좋았다.
아 참, 그 여성분이 리무진을 현금으로 사 준 게 아니었다는 것. 36개월 할부였다. 가물에 콩 나듯 가끔 우리 집으로 연체 고지서가 날아오긴 했지만, 거의 매달 약 36만 원 정도가 들어가고 있었다. 자동이체를 해놓은 것으로 보였고, 연체 고지서가 우리 집으로 날아오지 않으면 그 달은 무사히 납입된 것이었으리라. 참 그 여성분도 대단하고 눈물겹도록 고맙다. 2002년 8월부터 시작해 만 3년 되는 날, 할부가 끝났으니 말이다.
리무진이냐 조랑말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런 기쁨도 잠시. 일죽 '더아모의집'이 2006년 12월에 허물어지게 되었다. (관련기사 : 내가 마음을 비우니 모두가 행복하더라, 14개월 걸려 내손으로 건축해 7일만에 철거한 삶터)
땅이 우리 것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사실 그동안 리무진은 연료비가 비싸서 조랑말(7인승 LPG 타우너)을 자가용으로 사용하고, 리무진은 공적인 일에만 사용해왔다.
모든 걸 포기하고 현재 사는 시골 빈 집으로 피난하다시피 이사 갈 때, 아내와 나는 망설였다. '리무진을 포기해야 되나, 조랑말을 포기해야 되나'를 두고. 가난한 살림에다가 좁은 시골 집 마당에 2대를 사용하긴 어려울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상의 하면서 차마 결론이 나지 않았다. 리무진을 포기하자니 그와 함께 한 추억이 애틋한데다가 기증해주신 여성분의 정성이 생각났고, 조랑말을 포기하자니 LPG 전용차라 연료비가 엄청 적게 드는 효자였고. 그렇게 고민하다가 다행히도(?) 조랑말이 알아서 퍼져주었다. 추운 겨울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주 맛이 가버렸다. 운명은 우리더러 리무진을 택하게 했다. 연료비의 부담을 안겨 준 채로.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훌륭한 결정이었다. 그 때 만약 순전히 경제적 이유로 리무진을 팔았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더아모의집'을 회생하게 하는 데 큰 몫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리무진의 부활
지금 사는 금광면 시골집에서 한동안 그의 활약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달랐다. 일죽면에 사는 '더아모의집' 청소년들과 지금의 우리 마을 청소년들과 함께 영화 보러가고, 놀러가는 데 사용되었다. 지금까지도 아이들과 우리 집을 연결해주는 아주 소중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안성 지역의 시민단체 등이 리무진을 사용했다. 어떤 때는 기사포함, 어떤 때는 리무진만. 어떤 때는 지인들의 야유회 때, 어떤 때는 시민단체 사무실 이사 때, 어떤 때는 시민단체 행사 때. 시골집에 와서도 그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살아오면서 몇 안 되는 '최고의 선택 베스트 5'에 드는 선택이었다. 그를 남겨두기로 한 것 말이다.
공항버스가 '리무진 버스'라서 이름 붙였는데, 사실 영화에서나 보던 리무진이랑 생긴 게 비슷해보였다. 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리무진,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덧붙이는 글 | '더아모의집'은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모임의 집'이라는 뜻으로 <문명 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등의 저자 송상호가 열어가는 집의 이름이다. 현재 안성 금광면 시골 마을 흙집에서 살고 있으며, 홈페이지는http://cafe.daum.net/duamo 이다.
2010.02.04 11:31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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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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