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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미리는 망치에게 병 이름을 듣자마자 이 단어를 떠올렸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이름은 썰물에 형체를 잃어버리는 모래알처럼 사라졌다. 미리는 속울음을 삼키며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항변했다. 억울했다.
삐욜라 숲에서 먹이를 구한다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양이들은 하나 둘 사람이 사는 마을로 내려가서 음식을 구해왔다. 미리는 처음부터 마을로 내려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사람이란 믿을 수 없는 동물이라고 믿어왔다. 억지로 숲을 뒤져 죽은 쥐를 찾았다. 하지만 섣불리 음식으로 단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죽은 쥐가 널려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안전한 숲이 아님을 증명해 줄 뿐이었다.
이들도 분명히 사람 사는 마을에 가서 오염된 것을 먹은 게 분명했다. 배가 너무 고플 때면 잘게 나누어서 먹긴 했지만 그럴 때면 꼭 배탈이 났다. 설사를 할 때도 있었고, 하루 종일 배앓이를 할 때도 있었다. 올 봄에 결혼을 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새끼들이 태어나자 상황은 더욱 힘들어졌다.
마을.
사람들이 사는 곳을 그렇게 불렀다. 미리는 처음 '마을'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삐욜라'만큼 좋은 기분이 들었다. 첫 느낌은 그랬다. 약간 설레는 기운도 들었고 뭔가 신비로운 것이 가득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했다.
처음 마을이란 곳을 내려가던 때가 생각났다. 그곳은 분주했다. 사람들은 무엇이 바쁜지 계속 왔다갔다했다. 처음 보는, 신기하긴 했지만 마을이 주는 따뜻한 느낌은 없었다. 우중충한 회색 건물들이 목을 조르듯 답답하게 서 있었다.
아파트 나무.
처음 간 곳은 회색빛 나무였다. 삐욜라 숲보다 엄청나게 키가 컸다. 아파트라 불렀는데 그 곳 사람들은 먹고 남긴 음식을 봉지에 담아 쉼 없이 밖으로 내왔다. 미리는 자동차 언덕에서 봉지를 본 적이 있었다. 먹을 수도 없었고 땅에 섞여 썩지도 않았다. 가지고 놀기에도 재미가 없었다. 자동차 언덕에 박힌 비닐봉지는 천덕꾸러기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아파트에서는 여기에 음식을 넣어 보관하였다. 그것이 모두 먹고 남은 것이라고 했다.
도대체 음식을 남긴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게다가 그것을 버린다니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이 버리는 음식이 없다면 삐욜라 숲에 사는 고양이들은 굶어 죽을 게 뻔했다. 미리는 함께 간 다른 고양이들로부터 음식물 쓰레기의 비닐 뜯는 법을 배웠다. 국물이 흐르지 않는 곳을 정확하게 뜯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시큼한 국물세례를 받아야 했다.
후다닥.
미리는 사람이 남긴 음식을 먹으면서 부지런히 누군가가 다가오는지를 살펴야 했다. 그러다 관리인이라 부르는 사람이 나오면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쳐야 했다. 관리인은 고양이들이 아파트를 냄새나게 하고 더럽힌다며 손에 불을 키고 돌아다녔다. 손에 달린 불을 정면으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조건 반대쪽으로 뛰어야 한다. 기다란 막대기도 들고 다니면서 고양이만 보이면 내려쳤는데 상당히 아팠다. 그래서 배운 것이 재빨리 먹는 법이다. 이것은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음식이란 자고로 냄새도 맡아가면서 천천히 배도 두드려가면서 먹어야 한다. 삐욜라 숲에서는 적어도 그랬다. 간혹 부엉이나 솔개 따위가 쥐를 넘보기는 했지만 안전한 곳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언제나 '빨리빨리'였다. 간혹 두 마리의 고양이가 서로 망을 보며 음식을 먹을 때도 있었다. 제일 기분이 나쁠 때는 입에 음식물을 넣은 채 도망가야 할 때이다.
닭튀김.
그 맛을 처음 보던 때를 잊지 못한다. 수아가 마을이란 곳에는 생선보다 더 맛있는 것이 있다고 했을 때 솔직히 콧방귀를 뀌었었다. 생선보다 더 맛있다니. 그건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상상은 상상할 수 없을 때조차도 상상할 수 있어야 했다. 수아로부터 닭튀김을 처음 얻어먹던 날. 미리는 그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생생한 살코기의 맛은 없었지만 적당히 익혀진 데다 적당히 요리가 된 닭튀김은 한 마디로 환상적이었다. 죽여주는 맛이었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말 그런 음식이었다. 냄새가 주는 강렬함은 놀라웠다. 닭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참 똑똑하다. 어떻게 닭을 이렇게 맛있게 만든단 말인가.
"너무 달거나 냄새가 독한 것은 피하거라."
정신없이 닭튀김을 먹을 때, 어머니가 해 준 말이 호숫가에서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생각을 뚫고 튀어 올라왔다. 그러나 미리는 물결처럼 번지는 메아리를 가슴 속에서 서둘러 지웠다.
"음, 엄마. 닭튀김은 그렇게 달지 않고 그렇게 냄새가 독하지 않아요."
미리는 닭가슴살을 우물거리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삐욜라 숲에서 먹어오던 음식에 비하면 이건 분명히 달고 냄새가 독한 음식이었다.
행운.
바로 그것이었다. 아주 운이 좋았다. 누군가가 놀이터에서 통닭을 먹다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집에 가고 없었다. 미리는 냉큼 달려가 닭다리를 물었다. 살이 오동통하게 붙어 있었다. 미리는 살짝 혀로 맛만 보고는 숲으로 달려갔다. 자동차 언덕을 지나자 냄새를 맡은 퓨츠의 큰 아들 퍄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동료애를 발휘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가족에게 갖다주는 것이 더 급했다.
아침부터 쫄쫄 굶고 있을 자식을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해졌다. 미리는 퍄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더욱 빨리 집으로 달려갔다. 비록 닭다리 하나였지만 그것은 적어도 가족을 향한 미리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미리는 사람 사는 마을에 점점 자주 내려갔다. 혼자만 살았다면 그렇게 죽자살자 내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가족을 먹일 만큼 음식을 구해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느낀 음식들이 이제는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더 먹고 싶어졌다.
약.
그건 끔찍한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약이란 건 원래 아플 때 나으라고 먹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과나무에도 약을 주고 배추에도 약을 준다고 하였다. 밤나무에도 약을 주었고 맛있는 배나무에도 약을 주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프지 말라고 약을 준 건데, 약을 먹은 사과를 먹은 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물론 그 쥐를 먹은 고양이들도 죽었다. 사람에겐 약이지만 동물에겐 독이 되는 모양이었다. 미리는 카리와 퓨츠가 떠올랐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조금씩 드러나는 이야기는 그랬다. 농약이라는 사람들의 약은 사람들이 먹는 모든 음식에 뿌려진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음식을 먹으면 사람들은 괜찮지만 동물에게는 아주 위험하다는 것이다. 망치가 마을에서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한 건 이 때문이었다. 닭튀김이나 생선에는 중금속이라는 또다른 약이 들어 있다고 했다.
쥐나 고양이들이 사람의 약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제 막 순수한 삐욜라 숲에서 나온 고양이들에게는 아주 치명적이었다. 그들은 이를 막아낼 만한 세포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마음의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생선찌개.
사람들은 정말 이상한 걸 먹는다고 생각했다. 배가 너무 고픈 어느 날, 미리는 아파트 앞쪽을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그 때 미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가게 앞에 놓여있는 그릇은 온통 빨간 물감을 칠해놓은 것같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그 안에 생선이 몇 마리 잠겨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 할 일에 열중해 있었고, 미리는 조심스럽게 생선을 먹기 시작했다. 생선을 먹으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빨간 물이 함께 딸려 왔다. 미리는 처음으로 생선찌개를 홀짝거리며 먹었다. 생선은 별로였는데 국물이 은근히 맛있었다. 짭짤하고 고소했다. 그 뒤로 미리는 그 가게를 자주 찾아가서 생선찌개를 먹었다. 왜 그렇게 맛이 있는지 몰랐다. 생선 토막이나 닭튀김은 가족에게 가져갈 수 있었지만 생선찌개는 가져갈 수가 없었다. 같이 간 수아에게도 먹어보라고 했지만, 이렇게 짜고 매운 건 먹을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미리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 찾아온 돌멩이병이 생선찌개 때문에 생긴 건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미리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맵고 짜고 뜨거운 생선찌개가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조금씩 적응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후회만 할 뿐. 생선찌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생선찌개는 닭튀김 이상으로 미리에게 새로운 기쁨이 되었다. 가족들에게는 조금씩 소홀해졌고 혼자서 생선찌개를 찾아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아졌다.
마음.
아저씨 이름은 마음이었다. 마을이라는 이름처럼 마음도 부드러운 이름이었다.
"넌?"
가게 아저씨가 물었다.
"미리."
그러나 아저씨에게는 그냥 냐옹으로 들릴 뿐이었다. 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아저씨는 미리를 위해 생선찌개를 반 만 먹고 밖으로 내 놓았다.
"조금 뜨거운데 먹을 수 있니?"
냐옹. 미리는 공순하게 "네"라고 대답하곤 홀짝홀짝 찌개를 먹었다. 미리는 아저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입맛을 다시며 혀로 입 주위를 핥았다. 미리는 아저씨가 좋아졌다. 아저씨도 미리가 좋은 듯했다. 가슴의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덧붙이는 글 | 예스24작가블로그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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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아동문학가, 독서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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