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방에 들어왔을 때 낡은 상 아래 구겨진 채 놓여있는 건 비방서였다. 맞대놓고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 책들은 아내의 방에 있는 것과 같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초설이의 아양 속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상구가 돌아오자 이도형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얼굴을 환히 펴며 백미 다섯 가마에 해당하는 금전을 내놓았다. 물론 그가 가져온 처방서에 대한 대가였다.
"서방님, 인산(仁山)이란 의원이 말씀하기를 이런 일엔 햇살이 요란한 날보다 비가 와야 음기가 성하다고 합니다. 다음엔 습기가 많은 날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서방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제가 그곳을 다녀오던 중 예전에 신세를 진 빚쟁이를 만났는데 어떻게든 따라와 나를 귀찮게 하려는 마음인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말하길, 나는 겉보기엔 이래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자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으나 내가 의원 댁에서 나오는 걸 보고 반신반의 하는 것 같았습니다만, 좀 더 확실히 하려면 서방님이 제가 쓴 것처럼 유서(遺書) 하나만 써 주십시오. 그 자가 치근거리면 그것을 보여주며 나의 모든 건 금(琴)이와 천(泉)이라는 이에게 예전에 줬다고 말하겠습니다."
"금이와 천이?"
"예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목숨같이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도형은 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금과 천이에게 상속하다'는 내용의 유서를 대필해 줬다. 그렇게 날들이 지나고 자나 깨나 비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어느 날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일어나고 빗발이 보이자 이도형은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다.
"이 사람아 이게 얼마 만인가? 이럭저럭 석 달이 지났네. 그 음기인가 뭔가가 강해야 약발이 잘 받는다지 않았는가? 이름난 의원이니 그 말을 믿고 지금껏 기다려왔네. 이참에 자네가 다녀오면 내 좋은 날을 택해 잔치를 열겠네. 어디 그뿐인가 약을 먹고 효험을 본다면 자네에게 백미 쉰 섬을 상으로 줄 게야. 그리 알고 수고 좀 해주게."
의원이 사는 곳이야 가고 오고 사흘이면 게으른 걸음이라도 남아도는 일정이다. 그래서 이도형은 이참에 약발만 잘 받는다면 무슨 재물을 풀어서라도 뻑적지근하게 잔치를 치러 자신의 세를 과시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초설이의 거처를 찾아들었을 때 예기치 않은 말을 듣고 마음자리가 편치 않았다.
"서방님, 몸이 이상해요. 그동안 내 서방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는데 몸이 이상해 산파 할미에게 증세를 말하자 아이를 가진 것 같답니다."
초설은 '작은 아씨도 아이를 가졌답니다'고 말을 하려다 그것만은 참았다. 의당 놀라워해야 할 이도형의 눈빛이 이상하게 출렁거렸다.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점에 대해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게 분명하지만 초설이에겐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 그러려니 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려서 황구가 물어뜯을 때 어디를 잘못 건드렸는지 의원은 이창배 대감에게 '이 아이는 성장해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했었다. 잠든 줄 알고 말했겠지만 그는 깨어 있었다.
이도형은 성장하면서 무엇이든 비뚤어지게 보는 습성이 있었으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신의 병은 고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어느 때인가 자신의 결점을 형수가 알게 돼 보기만 하면 웃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이 자신을 비아냥댄다는 점에 분개한 이도형은 독을 뿌린 얼음을 송곳처럼 갈아 잠든 형수의 배꼽을 찔러 절명시켰다.
상구가 한양에 올라가 약재상에서 독극물을 입수해 내려오게 된 사실을 관아에서 알게 된 건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면서였다. 조정에선 이를 역모로 몰아 치죄했고 매타작을 견디다 못한 죄인들이 극구 함구하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들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절차 중에 있었을 때, 가을로 접어든 날씨는 때 아닌 우기(雨期)에 빠져 줄기차게 빗발을 뿌려댔다.
하루가 지나자 비는 온종일 내리더니 그날 밤엔 천둥번개를 동반하여 으르렁댔다. 모처럼 마음이 편해진 것일까. 이도형은 부인있는 방엔 얼씬도 않은 채 초설이의 몸을 깔아뭉개며 의미심장한 눈길을 팔랑거렸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부엌일을 하는 나주댁에게 일렀다.
"이번 잔치는 자네가 알아서 하게. 자네 음식 솜씨가 그만이라들었네. 음식은 차갑지 않으면 변질될 우려가 있으니 얼음을 풍성히 갖다 달라 하게. 오늘 저녁이 지나면 빗발이 그칠 것 같으니 내일이라도 잔치를 열게 서둘러 주게."
초저녁부터 추적거리던 빗줄기는 자정이 가까워지자 앞뒤 분간 없이 쏟아졌다. 집안에 있던 하속배들은 비가 그치면 잔치를 한다는 귀엣말을 들었는지 저희끼리 담소를 나누며 즐거워했지만 둘째 아씨는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미 광제원으로 약을 가지러 떠난 줄 알았던 상구가 한밤중에 작은 아씨 방에 들어와 다짜고짜 불을 끄고 여인을 쓰러뜨렸다.
"잠깐만 기다려요. 이러다 서방님이 들어오면 우린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러니···."
말은 채 뒷 매듭을 짓지 못했다. 그녀는 두 손을 고리처럼 만들어 사내의 등에 깎지를 꼈다. 스스로 생각해도 당치않을 마음 자락의 요동이었다.
'이게 얼마 만인가. 밤마다 이 사내를 기다리는 건 내가 요부여서인가?'
이런 생각은 사내의 몸놀림이 시작되면서 멀찍이 도망쳐 버렸다. 한 차례 뜨거운 숨결을 몰아쉬고 난 후, 상구는 품속에서 기선당(奇仙堂)이라 쓰인 작은 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화목하게 사는 걸 꿈꿔 왔습니다. 부인을 사모해 이렇듯 뛰어들었습니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장차 내가 부인 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항상 있는 것처럼 생각해 마음 써 주신다면 설령 죽었다 해도 부인을 잊지 않고 찾아올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 한 가지 부인께 청이 있습니다. 이 기선당은 서방님의 병 치료에 도움되는 물약입니다. 이것을 복용하면 서방님의 걱정 거리를 치료할 수 있으나 어지간해선 복용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부인께서 이 기선당 몇 방울을 탕기(湯器)에 떨어뜨려 그릇을 깨끗이 씻어낸 후 약을 드시면 효험을 볼 것입니다."
상구가 떠난 후 작은 아씨는 기선당에 든 액체를 떨어뜨려 탕기를 씻어냈다. 때마침 방에 들어온 이도형이 그것을 보고 눈빛이 묘하게 번들거렸다.
"그것으로 나를 죽이려는 거요?"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이도형의 눈이 야릇하게 빛을 뿜었다. 그는 자리끼의 물을 그곳에 따르더니 부인의 눈앞에 들이댔다. 마시라는 것이다. 그제야 부인은 아차 싶었다. 기선당이란 약재가 독약인지 어떤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든 걸 체념하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박하 향같은 향내가 목젖을 타고 넘어가자 심신이 상쾌해졌다. 그제야 이도형은 머쓱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내가 농이 심했나 보오. 부인께서 나를 위해 그 같은 탕기를 준비하신 걸 모르고 마음을 어지럽혔구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본심은 결코 그런 것 같지 않았다.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던 지 이도형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는 의혹을 품고 있었다. 어쩌다 부인을 안아보았지만 이상하게 차가웠다.
초설이가 혼잣말처럼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묘한 분노가 머리 한쪽에서 똬리를 튼 느낌이 부인에게서 풍기는 걸 짐짓 모른 척했다. 그가 오늘 부인의 방에 들어온 것은 혹여 아이를 갖지 않았느냐 물어볼 참이었다. 부인이 탕기만 닦지 않았다면 당연히 물어봤을 일이었다.
비가 내리는 중에 뜻밖에 인산 선생이 보낸 심부름꾼이 당도했다. 그의 손엔 선생이 혼신의 힘을 다해 지었다는 탕약이 들려 있었다. 상구는 무슨 일인지 약첩을 준비한 채 돌아오지 않아 부득이 심부름꾼을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선생의 서찰을 받아든 이도형은 환하게 웃으며 초설이를 불러 턍약을 끓이라 내줬다.
"온 정성을 다해 끓이게!"
비가 왔지만 곳곳에서 초빙한 손님들이 찾아들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이도형은 평소 자신이 자격지심으로 여겼던 문제가 해결됐다는 점에서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자, 한잔들 하십시다!"
그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 초설이가 가져온 탕약을 마신 후 뒤로 넘어져 버렸다. 그의 입에선 줄줄이 피가 흘렀다. 때마침 현장에 당도한 정약용은 뜻하지 않은 사태에 어안이 벙벙했다. 부인이 나섰다.
"서방님께선 진즉부터 이런 생각을 하셨습니다. 본래는 집안 식구들과 함께 저승으로 가려했는데 생각을 바꾸었답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고개를 젓자 형방이 소곤거렸다.
"이도형이 독이 든 음식을 먹은 건 그렇다 치고, 그 자가 얼음을 기다랗게 깎은 건 얼음 침(氷針)을 만들려는 속셈입니다. 그것으로 누군가를 노리기 위해 잔치를 연 것 같은데···. 그런 자가 스스로 독약 먹고 죽는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뒤쪽에서 형방의 귀엣말을 들은 초설이가 끼어들었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 나으리는 오래전부터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쇤네는 그게 뭣인지 모르나 미루어 생각건대 형수님의 배꼽을 바늘 침으로 찔러 살해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것 때문에 오래도록 마음고생이 심하셨는데 서방님에게 일이 생기면 자신의 재산을 두 아이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우리에게 말해줬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천, 딸을 낳으면 금이라 짓고 그 아이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작은 아씨와 초설이 몸엔 생명의 씨가 자라고 있었다. 부인은 비가 쏟아지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서방님은 무척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지만, 슬픔도 많은 분이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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