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초리에 남아 있는 옛 포구의 흔적과거 탐라를 공략하려는 자들은 우선 추자도를 교두부로 삼았다. 김방경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나 최영이 이끄는 토벌군이 공히 탐라를 공략하기 전에 추자도에 들어와 때를 기다렸다.
장태욱
1273년 4월, 여몽연합군은 나주에 집결한 후 탐라로 향하는 길에 추자도에 정박하며 시간을 기다렸다. 추자도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일격에 삼별초를 압도하려는 계획에서였다.
여몽연합군, 추자도를 교두부 삼아 삼별초를 공격해여몽연합군이 추자도에 입도하는 과정에서 삼별초군과 연합군 간에 교전이 있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여몽군이 진격해올 것을 알아차린 삼별초군이 사전에 제주로 철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의 대규모 화공을 당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3년에 걸쳐 이어졌던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막을 내리고 제주는 원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1276년에 이르러서는 제주의 수산평에 몽골식 목장을 개설하여 몽골의 말, 소, 낙타, 나귀, 양 등을 방목했고 목장의 관리를 위해 원의 목호(牧胡)들을 파견하였다.
이후 제주에서 길러진 말들은 원의 조정과 고려 조정에 진상되었다. 그밖에도 원과 고려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제주사람을 선박건조 사업에 동원하기도 했고, 이들로부터 각종 토산물을 착취했다. 제주 역사상 민초들이 가장 가혹한 착취에 시달리던 시기다.
그리고 100년의 세월이 흐르자 중국에서 원의 세력이 약해지고, 그 자리를 명이 대신하게 되었다. 이에 편승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공민왕 주도로 반원자주의 바람이 불었다.
고려조정은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제주산 말을 명나라에 진상하려 하였는데, 그때마다 제주에 남아있던 원의 목호들이 반기를 들었다. "조국(원나라)의 원수국에게 말을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1374년에 이르자 명나라 황제가 사신을 고려로 보내 북원(몽골)을 정벌할 때 필요한 말 2000필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지만, 목호들의 반대로 고려조정은 원의 요구에 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