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 고불 맹사성은 '소를 타고 다니는 재상'으로 더 유명하다. 고려 공민왕 9년인 1360년에 태어나, 조선조 세종 20년인 1438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신창이며 자는 자명, 호는 고불이다. 각종 벼슬을 거쳐 1427년 우의정, 1432년 좌의정을 지내고 난 후 1435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황희와 함께 조선 초 우리 문화를 이룩한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고불은,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로 명성을 높였으며, 효자로 유명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지기도 했다.
고불은 아랫사람이라고 하여 절대로 무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면 대문 밖까지 나가 맞아들이고 상석에 앉혔으며, 손이 떠날 때도 반드시 대분 밖까지 배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고불이 머물던 곳이 바로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소재한 맹씨 고택이다. 현재 사적 109호로 정해진 맹씨 고택에는 맹사성이 살던 고려 때 지어진 고택과, 맹사성이 심었다는 수령 600년이 지난 은행나무, 그리고 맹우, 맹희도, 맹사성 등의 위패를 모신 세덕사가 있다.
하늘 높이 솟은 은행나무엔 충심이 깃들고
행단은 은행나무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돌담으로 양편을 쌓은 쪽문 안에는 <청백리 고불 맹사성 기념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 있어 안을 볼 수가 없어 아쉽다. 밖으로 돌아 계단을 오르면 맹서상의 후손이 살고 있는 듯, 문패가 달린 솟을대문이 있고 안으로는 ㄱ 자 형의 집이 있다. 그 집을 바라보고 우측 계단으로 오르면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우측의 은행나무는 외과 수술을 한 듯 나무 가운데에 남성의 생식기 같은 시멘트로 바른 죽은 가지가 보인다.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모두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다. 수령 630년이 지난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쌍행수'라고 부르는데, 높이는 35m 둘레는 9m 정도에 이른다. 이 나무는 고불 맹사성이 1380년경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잎이 떨어져 가지만 남아 있어도 이렇게 위용을 보이고 있으니, 여름 무성한 잎을 달고 있다면 대단할 것 같다.
680년이 지난 맹씨 고택
은행나무 앞으로는 고택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고불 맹사성이 살았던 고택이다. 이 집은 고려 충숙왕 17년인 1330년에 최영 장군의 부친인 최원직이 지었다고 하며, 실제로 무민공 최영이 살았던 집이다. 고려 우왕 14년인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무민공이 죽임을 당하자, 비워져 있던 집을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가 은거하였다고 한다.
고불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자사위이다. 최초로 지어진 지 680년이나 된 이 고려 때의 고택은, 최영과 맹사성이라는 역사의 일면을 장식한 두 사람이 거처로 정했던 곳이기도 하다. 맹씨 고택은 성종 13년인 1482년, 인조 20년인 1642년, 그리고 순조 때인 1814년과 1929년에 각각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집은 '공(工)' 자 형으로 꾸며져 있으며, 27.5평에 불과하지만, 고려 때의 고부재와 창호 등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집이다.
집안 곳곳에 배어 있는 청렴
최영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다. 고불 맹사성은 청백리로 소를 타고 다닐 정도로 청렴한 정승이었다. 이 두 분의 마음이 맹씨 고택에는 그대로 배어 있다. 그래도 일국의 재상을 지낸 고불이었지만, 집은 있는 그대로 살았다. 기단은 커다란 자연석을 이용하였고, 주추도 다듬지 않았다. 중앙에는 두 칸의 마루를 놓고, 양편에는 길에 방을 드렸다. 그 방의 끝이 앞뒤로 삐죽이 나와 工 자 형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방은 별다른 꾸밈없이 양편에 길게 들였는데, 뒤편을 막아 각각 윗방을 들였다. 뒤로 돌아가면 양편에 높게 고풍스런 굴뚝이 서 있다. 아궁이는 별다르게 부엌을 만들지 않고, 앞면 담 밖에 아궁이를 놓았다. 밑에 사람을 쓰지 않고 직접 불을 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맹사성은 이럴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700년 가까운 세월. 그렇게 청빈한 주인들이 살다 스러져간 고택 한 채. 그 집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남들은 앞을 다투어 고래등 같은 집을 짓고, 자신의 권세를 보이고자 할 때, 그저 작은 집 하나로 비를 피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 평생을 집을 닮은 마음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마음 하나를, 비워놓은 내 마음에 담아 돌아간다.
2010.03.07 14:34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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