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여인의 탑'엔 특별한 전설이 있다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6] 피레네 산맥의 사랑 이야기

등록 2010.03.12 18:28수정 2010.03.13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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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승합차를 두고 산에 올랐다.

승합차를 두고 산에 올랐다. ⓒ 지은경


스페인의 카탈루니아 지방. 높은 피레네 산맥과 풍족한 자연의 혜택을 입은 이곳은 스페인에서도 꽤 부자동네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 지점인지라 언어 또한 스페인어에 프랑스어를 살짝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다.

a  에르미타 드 라 마레 드 데우 드 레스 네우스(Ermita de la mare de Deu de les Neus).

에르미타 드 라 마레 드 데우 드 레스 네우스(Ermita de la mare de Deu de les Neus). ⓒ 지은경


고불고불 멀고먼 피레네 산맥의 길들을 지나면 깊은 산 속에 한 에르미타가 있다. 에르미타 드 라 마레 드 데우 드 레스 네우스(Ermita de la mare de Deu de les Neus).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험악한 산길을 오르기에는 승합차가 많이 지친 듯했다.


a  무거운 대형 삼발이를 맨 사진사 세바스티안.

무거운 대형 삼발이를 맨 사진사 세바스티안. ⓒ 지은경

"올해가 에르미타 익스프레스의 마지막 겨울이 될 것 같아.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을 나와 함께 했는데…. 사진을 찍고 내려오며 조용히 주차된 승합차를 바라보면 마치 튼실하고 충직한 짐승 한 마리가 나를 기다리는 듯했지. 멀리에서 혹 다른 노란색 승합차를 만나도 가슴이 따뜻해지곤 했어. 이놈을 보내고 나면 무척 아쉽고 허전한 느낌이 한동안 들 거야."

승합차의 운전대를 쓰다듬으며 세바스티안이 말했다.

차에서 내려 한 시간 남짓 장비를 들고 산을 올라야 했다. 이렇게 공을 들여 산길을 올라 다행히 아름다운 에르미타와 구름이 기다려준다면야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언제나 사진에 포착되는 이상적인 순간을 바라는 일은 미지수와도 같다.

그러나 이곳 에르미타 드 라 마레 드 데우 드 레스 네우스에 도착하자 오늘의 산 오름은 헛고생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얇은 돌을 층층이 정교하게도 쌓아 올린 아름다운 에르미타가 눈을 맞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귀여운 여인의 탑'에 얽힌 특별한 사랑의 전설


a  눈 속에서 사진촬영.

눈 속에서 사진촬영. ⓒ 지은경


이곳은 다른 에르미타들과는 달리 특별한 사랑의 전설이 있다. 아랍인들과 스페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세력 싸움에서 기독교 세력이 점점 강해지자 아랍인들은 서서히 영토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영주와 그의 딸이 살고 있었다. 영주의 딸은 너무도 아름다워, 당시 표현에 따르면 사과 꽃을 바라보는 느낌이라 했다. 어느 날 산책 중 그녀는 이슬람 제국의 한 사라센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둘은 즉시 사랑에 빠졌다.


이 사실을 안 영주는 사라센에게 소중한 딸을 줄 수 없다며 에르미타 옆 높은 탑 라 토레 드 라 미뇨나(La Torre de la Minyona, 귀여운 여인의 탑) 맨 꼭대기에 그의 딸을 가두었다.

매일 두 명의 하인만이 이곳을 방문할 수 있었는데, 그 두 하인은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보석, 화려한 드레스들을 들고 찾아왔다. 그러나 영주의 딸은 탑에 갇혀 아무것도 먹지도 아름다운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지도 않은 채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몇 달 후 어두운 겨울 밤, 사라센 무사는 탑 위를 맨손으로 올라 영주의 딸을 구출하고 말 위에 올라탄 후 달아나고야 말았다. 영주는 딸을 잃은 슬픔과 분노에 못 이겨 그가 가진 모든 마을의 땅과 성들을 팔았다.

그리고는 그 사라센을 찾아 죽이고 딸을 데리고 오겠노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났다고 한다. 이후 아무도 영주를 본 사람은 없으며 사라센과 영주의 딸은 아랍 제국으로 귀향해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전설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욕망의 문을 두드리기에 전해진다

a  사라센, 영주, 그리고 그의 딸이 등장하는 전설을 그린 그림.

사라센, 영주, 그리고 그의 딸이 등장하는 전설을 그린 그림. ⓒ 지은경


옛 이야기들은 얼핏 단순한 것 같지만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욕망의 문을 두드리기에 오랜 시간에 걸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곤 한다. 어쩌면 가장 단순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이 복잡한 세상을 헤쳐가는 지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에르미타만이 남아 있을 뿐, 영주의 딸이 갇혔던 탑은 허물어져 앙상한 잔재의 돌무덤으로 변모하였다.

a  산을 내려오며 멀리 보이는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산을 내려오며 멀리 보이는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 지은경


우리는 그곳에 전해져 내려오는 사랑 이야기를 나누며 산에서 내려왔다. 저 아래,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승합차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애마. 비록 이 꼬불거리는 험한 산길을 우리와 동행할 수는 없지만 멀리서 우리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노란색 승합차를 보자 추웠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사라센과 영주의 딸도 이 험한 산길을 말로 달리며,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뜨거운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지은경 기자는 지난 2000~2005년 프랑스 파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경상남도 외도 전시 기획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현재 스페인에 머물고 있으며, 미술, 건축, 여행 등 유럽 문화와 관련된 기사를 쓸 계획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지은경 기자는 지난 2000~2005년 프랑스 파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경상남도 외도 전시 기획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현재 스페인에 머물고 있으며, 미술, 건축, 여행 등 유럽 문화와 관련된 기사를 쓸 계획입니다.
#에르미타 #스페인 #피레네 산맥 #에르미타 드 라 마레 드 데우 드 레스 네우스 #귀여운 여인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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