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봄과 어울리다

진실을 말해주는 시간

등록 2010.03.11 11:52수정 2010.03.1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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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르면서 왜 영문학과를 왔나!"

 

83년 이맘때 대학 신입, 첫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던져진 학과장님의 우스개소리 섞인 호된 호통으로 그렇게 영문학과에 입문을 했습니다. 학과장님의 말씀은 명언이어서 영문 모르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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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ld man and the sea ⓒ 장성희

The old man and the sea ⓒ 장성희

헤밍웨이 전공이신 머리 하얗던 노교수님. 지금 생각해보니 첫 강의 시간에 그 분이 들고 들어오신 <노인과 바다> 속 노인 산티아고와 어딘지 비슷한 곳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리고 보얗기만 하던 83년의 봄날과 <노인과 바다>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망망한 바다에서 청새치와의 지루한 싸움을 벌이는 그 장면들은 아직 철없는 끄트머리 십대였던 내겐 따분하기만 하여 수업시간에도 마음은 월미도의 <헤밍웨이> 카페에 앉아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따라 다닌 게 아닌가 싶습니다.

 

며칠 전 한국에 있는 대학 동기들과 아들 딸, 대학 합격 소식을 서로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만난 것이 대학 신입, 바로 그 때인데 벌써 우리 자녀들이 그 시간에 가 있네."

 

문득 친구들이 그리워졌기 때문일까요? 그 시절이 그리워졌기 때문일까요.

 

가끔 한 주의 일과를 마치고 남편과 함께 보는 영화 목록 중에서 저는 <노인과 바다>를 골랐습니다. 그 옛날에 <노인과 바다>를 읽던 어린 날을 생각하면서 1999년에 리메이크한 주드 테일러 감독의 작품을 먼저 보고 다음날 아카데미상을 받았던 1958년 존 스터지스 감독의 그것을 보았습니다.

 

84일 동안 한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던 한 늙은 어부가 포기하지 않고 혼자 바다로 나갔다가 1500파운드나 되는 거대한 청새치를 잡으려 삼일 밤낮 혼신의 싸움을 벌이다 마침내 포획하지만 돌아오는 바닷길에서 달려드는 상어떼에 그 큰 청새치의 살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꼬리에 앙상한 뼈만 남은 청새치와 함께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내용입니다.

 

1951년에 쓰고 1952년에 출판되어 1953년에 퓰리쳐 상을 수상하고 1954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고 전세계의 영문학 교재로 쓰여지고 있는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이십 칠년 전 따분했던 영문학 교재에서 이 봄에 저의 품을 이렇게나 깊이 파고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안소니 퀸이 열연한 영화, 1999년 작품에는 원작에 없는 작가와 작가의 연인이 그 곳에 등장합니다. 잡히지 않는 글맥을 찾아 조용히 노인과 소년을 주시하며 쿠바의 한 바닷가 마을에 머물고 있는. 대어를 낚지 못하더라도 무사귀환을 바라며 바다에 나가 며칠째 돌아오지 않는 노인을 기다리는 작가에게 그의 연인이 말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그 연인은 아마도 바다에 나간 노인 보다는 무위도식, 그저 메모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작가에게 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녀에게 작가는 "아인쉬타인은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했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시간은 진실을 말해주기도 하죠"라고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떠한 대상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는 일입니다. 열아홉살의 나, 아직 인생의 깊은 맛을 모르는 그 나이에 <노인과 바다>가 지금처럼 끝없는 파도를 일으킬 수는 없었을테지요. 마을에서도 바다에 나가서도 청새치를 놓지 못하는 고집스런 노인의 꿈과 의지를 그 나이에 제가 다 이해했다면 누가 저한테 연애를 걸어오기나 했겠습니까.

 

인생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은 꿈도 욕망도 그에 따른 위대한 결과물도 아니라는 것을. 나이를 초월한 벗, 제자 마놀린의 친밀하고 사려깊은 위로의 말 한마디, 자비로운 행위와 그 살뜰한 마음이라는 것을 열아홉에 모두 알았다면 말입니다.

 

따분했던 소설과 징그러운 비평이 27년이란 시간을 넘어 지금에서야 조금씩 온도를 높이며 나의 창가를 따듯하게 하는 2010년의 봄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중앙일보 애틀랜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3.11 11:52ⓒ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중앙일보 애틀랜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노인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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