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391)

― '굴지의 기업', '굴지의 법인' 다듬기

등록 2010.03.13 13:28수정 2010.03.13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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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굴지의 기업

.. 삼성전자는 이제 브랜드가치가 125억 달러에 이르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  <최용식-한국영어를 고발한다>(넥서스,2005) 19쪽


'브랜드가치'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회사에서 만드는 물건 값이 오르지 않습니다. '상품값어치'나 '상품값'이라고 적어 주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말 그대로 적으려고 하는 사람은 잘 안 보입니다. 회사를 꾸리고 물건을 만드는 분들은 물건값을 가리켜 '물건값'이라 하는 일이 없이 '물가'라고만 하고, 상품에 매기는 값어치를 놓고 '상품값'이나 '상품값어치' 또는 '상품가치'라고 이야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보기글에서는 "125억 달러에 달하는"이라 안 하고 "125억 달러에 이르는"이라 적은 대목이 반갑습니다. 그렇지만,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기업으로 컸다"나 "기업으로 발돋움했다"로 다듬어 주어야 합니다.

 ┌ 굴지(屈指)
 │  (1) 무엇을 셀 때, 손가락을 꼽음
 │  (2) (주로 '굴지의' 꼴로 쓰여) 수많은 가운데서 손가락을 꼽아 셀 만큼
 │      아주 뛰어남
 │   - 국내 굴지의 대학 / 한국 굴지의 실업가 /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
 │
 ├ 세계 굴지의 기업
 │→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업
 │→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기업
 │→ 세계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기업
 └ …

무엇을 세면서 손가락을 꼽는다면 우리는 '손가락을 꼽는다'고 하지 '굴지한다'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굴지의 기업"이니 "굴지의 대학"이니 "굴지의 재벌"이니 하고 나옵니다. 토씨 '-의'를 붙이는 말투는 널리 퍼져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어느 누구도 '굴지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국어사전을 뒤적여도 '굴지하다' 보기글은 한 가지도 안 실립니다. 그렇지만 '굴지 + 의' 보기글은 여럿 실립니다.


 ┌ 국내 굴지의 대학 → 나라안에 손꼽히는 대학
 ├ 한국 굴지의 실업가 → 한국에서 손꼽히는 실업가
 └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 → 우리 나라에서 손꼽히는 재벌

우리 말은 말끝 하나를 바꾸면 말느낌이 새로워집니다. 토씨 하나 손보면 말맛을 달리합니다. 이런저런 보기글은 한결같이 '손꼽히는'으로 고쳐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손꼽히는 기업"이나 "손꼽을 만한 대학"이나 "몇 손가락으로 꼽는 재벌"이라고 적으면서 느낌과 맛을 사뭇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나라안에 손꼽는 대학"이라 해도 되고, "나라안에 손꼽게 되는 실업가"라 해도 되며, "나라안에서 손가락으로 꼽는 대단한 재벌"이라 해도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뜻과 말느낌 곰곰이 헤아리며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분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굴지 + 의' 말투를 즐겨쓰는 분들은 이 한자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똑똑히 알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뜻을 똑똑히 알고 있다면 왜 이 말투를 그렇게 즐겨쓰고 있을까요. 익숙해서 쓰는지, 사람들한테 도움이 될 만하다고 느껴서 쓰는지, 이 낱말처럼 알맞거나 괜찮은 낱말은 더 없다고 보면서 쓰는지 궁금합니다.

 ┌ 굴지의 싸움꾼 → 내로라하는 싸움꾼
 ├ 굴지의 조직들 → 굵직굵직한 모임들
 ├ 굴지의 브랜드 모델 → 잘나가는 상품 모델
 └ 세계 굴지의 클래식 레이블 → 세계를 주름잡는 클래식 상표

설마 싶어 인터넷 찾기창에 '굴지의'를 넣어 봅니다. 수없이 많은 보기글이 뜹니다. 여느 사람 누리사랑방이며 누리모임이며 신문이며 …… 끝이 없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군데 신문, 수십 군데 기사에 이 말마디가 깃들어 있습니다. 경제신문뿐 아니라 여느 신문에서도 쓰고 스포츠신문에서도 쓰고 정보통신신문에서도 씁니다. 진보신문에서도 쓸 테며 대학신문에서도 쓰겠지요. 거의 모든 자리는 "굴지의 기업"이나 "굴지의 재벌"입니다만, 이 말마디를 붙이는 이들 가운데 왜 '굴지'여야 하는가를 옳게 깨닫는 이는 드물다고 느낍니다. 웬만한 자리는 '큰 회사'나 '대기업'이라 할 때가 알맞다고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그야말로 다섯손가락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큼 '대단하'거나 '크'거나 '놀랍'거나 '어마어마한' 무엇이나 누군가를 가리키는 자리에 '굴지 + 의'를 넣지 않고, '고만고만하게 큰 어슷비슷한' 무엇이나 누군가를 가리키면서 '굴지 + 의'를 넣는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말마디를 쓰는 일이 옳으니 그르니를 떠나, 알맞게 쓰는 사람조차 드뭅니다.

아무래도 얄궂은 말투이기 때문에 쓰임새 또한 얄궂다고 할까요. 옳게 깨닫고 옳게 쓸 줄을 모르기 때문에 옳지 않게 아무렇게나 쓴다고 할까요. 말뜻과 말씀씀이를 옳게 가누지 않으니, 옳지 않은 말마디를 옳지 않은 말투에 담아낸다고 할까요.

이 나라 사람들은 하나같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말바보요 글멍청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둘레 누구나 한결같이 손꼽히는 말허릅숭이요 글쥐대기가 아니랴 싶습니다.

ㄴ. 굴지의 법인

.. 굴지의 법인이 추진하는 골프장 예정 지역이었다. 주민들의 반대가 첨예한 현장에서 실시된 생태조사에서 나는 놀랐다 ..  <박원순과 52명-내 인생의 첫 수업>(두리미디어,2009) 146쪽

'추진(推進)하는'은 '꾀하는'이나 '밀어붙이는'으로 다듬고, "골프장 예정(豫定) 지역(地域)이었다"는 "골프장을 지으려는 곳이었다"나 "골프장을 짓는다는 곳이었다"로 다듬습니다. "주민(住民)들의 반대가 첨예(尖銳)한"은 "주민들 반대가 날카롭게 부딪히는"이나 "동네 사람들이 크게 반대하는"으로 손보고, '실시(實施)된'은 '이루어진'이나 '벌인'으로 손봅니다. '현장(現場)'은 그대로 두어도 되고, 이 자리에서는 '곳'이나 '자리'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 굴지의 법인이
 │
 │→ 잘나가는 법인이
 │→ 돈 많은 법인이
 │→ 나라안에 (크게) 이름난 법인이
 └ …

말뜻을 살피면 '손꼽는'이나 '손꼽히는'을 일컫는 한자말 '굴지'입니다. 그러나 이 보기글은 "손꼽히는 법인"이라고 고쳐 줄 때에 그리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 몇 손가락으로 꼽을 만하다는 법인이라기보다, "돈이 많다"거나 "이름이 높다"든가 하는 법인이라고 적어야 알맞구나 싶어요. 또는 "잘나가는 법인"이라고 하든지 "크게 이름을 떨치는 법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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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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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토씨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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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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