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 동굴 속의 탱고(7)

이상한 버스

등록 2010.03.13 16:09수정 2010.03.1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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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줄거리

미대생 수연은 애인과의 지루한 일상과 학교 생활에 지쳐가고 있던 중, 아르헨티나 관련 책을 읽고 빠져든다. 그리고 보카마을에서 페르도라는 남자를 열심히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현실로 돌아온 수연은 애인이 갑자기 사라진 시간에 죽은 언니에 관해 회상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7. 이상한 버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책을 꺼냈다. 좌석 버스 뒤쪽은 포근하고 아늑하다. 졸음이 엄습했지만 책을 읽어나갔다. 집중하기가 힘들어서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으니 버스가 흔들릴 때 마다 머리가 쉼 없이 창문에 부딪친다. '아직은 초저녁인데 졸립구나' 하면서 따가운 눈을 잠깐 감았다 떠야지 생각했다.

 

탈 때부터 버스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오늘 따라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 사람이 드문 것도 이상했다. 아마도 텔레비전에 뭔가 재밌는 프로가 있어서 다들 그걸 보러 갔거나 주변 야외 경기장에 대형 가수의 콘서트가 있는 거겠지 하는 생각으로 무심코 버스에 올랐다. 할머니 한분과 나보다 나이가 조금 들어 뵈는 아가씨 한명, 그리고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와 운전사가 승객의 전부였다. 총 다섯 명을 태운 버스는 정적 속에서 어두운 길을 달리고 있었다.

 

오늘 처음 타본 노선이라 낯선 길이 어색하긴 했다. 하지만 버스를 탈 때 분명히 우리 동네까지 간다고 했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다. 나는 졸린 눈을 잠시 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이 몹시 따갑다. 비포장도로를 지나가는지 차가 몹시도 흔들렸다. 창문에 기댄 머리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흡사 파도가 있는 여름 바다에서 보트위에 올라탔을 때의 기분이다.

 

오래전 그 여름, 노곤한 바닷물의 온기와 미끈한 감촉에 물속으로 끝없이 침잠하던 기억이 스친다. 여름날의 뱃고동 소리, 먼 해변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나는 그들과 상관없이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바람이 휙 하고 불때마다 밀려오던 수초냄새....그리고 비린내..그래 비린내다!

 

파도소리가 '쏴악' 하고 밀려온다. 웅성이는 사람들의 소리, 그리고 차가운 한기가 조금씩 느껴진다.

"이봐! 거기다 놓으면 안돼!"

"빨리 끝내고 가자고! 오늘은 특별한 날인 거 다들 알지?"

"이봐요, 좀 비켜줘요. 여기서 뭣하고 있는 거요!"

 

누군가가 내 어깨를 심하게 흔들어 깨운다. 실눈을 떠본다. 흠칫 놀란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킨다. 한줄기 바람과 함께 밀려오는 파도...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항구에 큰 배가 한척 정박해 있고 사람들이 열심히 나무 상자를 나르고 있다. 다시 파도소리가 밀려오고, 그다음은 수초 냄새가 진동한다. 아니다... 어쩌면 정어리의 비린내인지도 모른다. 지독한..너무 지독한 비린내..

 

머리가 몹시 흔들린다. 이젠 아예 대놓고 누가 때리는 기분이다. 그리고 슬며시 잠기운이 어딘가로 사라질 즈음, 나는 눈을 뜬다. 버스는 긴 터널을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불안해진 나는 시계를 들여다본다. 저녁 8시10분.

 

"저... 이 버스가 어디 까지 가는 건가요?"

나는 건너편에 앉은 남자에게 물어본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 옆자리로 다가와 앉는다.몸에서 훅 하고 비린내가 끼쳤다.

"보카 항구까지 갑니다."

"네?"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본다.

 

"오늘 일을 다 끝냈거든요.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페르도입니다."

그는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 하얀 치아가 가지런히 드러난다. 생각보다는 미남이었고 키도 커보였다. 내가 생각해 놓은 페르도가 저랬단 말이지?

"다른 분들도 당신과 같이 갈 겁니다. 편히 쉬어요. 그러면 보카에 도착해 있을 겁니다,"

 

나는 조용히 몸을 세워서 버스 안을 둘러보았다. 앞 좌석에는 할머니가 앉아서 열심히 뜨개질을 하고 있다. 흔들리던 버스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재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실을 이리저리 꼬고 있는 모습은 가히 예술적이다. 뒤쪽 좌석에는 아가씨가 앉아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다. 껌을 씹으며 내는 '딱딱'소리가 버스 안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요란스러운 껌 소리와 현란한 입놀림, 그리고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가만 보니 그녀는 조금씩 울고 있었다.

 

"저들은 어떻게 이 차에 타게 됐죠?"

"제가 불러 모았지요.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각자의 방식으로 보카를 그리워 한 것이고요. 그리고 오늘 당신과 함께 이 버스에 탄 것입니다. 이제 조금 눈을 감고 쉬어요. 그게 당신에게 편할 겁니다"

페르도는 좀 전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눈을 감는다. 버스는 정신없이 흔들리며 불빛도 없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달리고 또 달린다.

 

<계속>

2010.03.13 16:09ⓒ 2010 OhmyNews
#아르헨티나 #보카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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