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시계 태엽 오렌지> 포스터
스탠리 큐브릭
이 사건을 접하면서 얼마 전에 본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 태엽 오렌지>이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았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알렉스와 친구들은 방황하는 청소년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들은 학교에도 가지 않고 마약 성분이 들어 있는 코로바 우유를 마시며 갖은 악행을 일삼는다. 이유나 동기 같은 것은 없다.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다. 결국 악행을 일삼던 알렉스는 친구들의 배신으로 감화원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세뇌교육을 받고 풀려나지만, 이번엔 피해자들에게서 고통을 받고 결국 창 밖으로 투신한다.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한 후 알렉스는 자신을 찾아온 정치인과 모종의 타협을 하고 루드비코 치료(인권을 말살하는 비인간적인 치료법)를 받는다. 하지만 그가 악행을 하려고 하면 고통을 느끼는 교화 방식은 겉으로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본성까지 바꾸지는 못한다. 그의 친구들에 대해서도 제도권으로 편입시켜 교화하려 하지만, 그들은 경찰이 되고 나서도 악행을 일삼는다.
결국 이 영화는 악은 어떤 방법을 써도 악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원작자가 실제로 겪었던 사건을 소설로 썼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범한 네 명의 군인들이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주인공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면에서 김씨보다는 강호순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
같은 남자로서 내게도 욕망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교육과 인성을 바탕으로 절제되고 참아야 하는 것이지 자기 맘대로 발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채 피어보지도 못한 아이에게 자신의 욕망을 잔인하게 배설해 버린 자를 향한 나의 증오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저렇게 끔찍한 범죄의 속성이 혹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특히 공부방에서 이런 이야기가 화제가 되면 그 순간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린다. 누구도 나를 향해서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위축되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그런 일이 없을 때와는 나를 대하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이렇듯 김○○ 사건 같은 성폭행 사건이 터지면 내겐 한동안 우울증 비슷한 것이 찾아온다.
비단 성폭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김○○과 강호순으로 대변되는 우리 안의 폭력과 모순은 무수히 많다. 편견, 차별, 인권 침해 등등. 그것들은 언제나 참기 힘든 욕망으로 치닿는다. 절제는 미덕이지만 인내를 필요로 한다. 차이는 필요하지만 차별은 필요없다. 다름과 틀림은 정답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수학 문제는 정답이 있지만 피부색은 정답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피부색에도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식화된 이분법을 좋아하진 않지만 위에서 언급된 것들은 크게 강자/약자로 나뉜다. 이 틀 속에서 보면 남자인 나는 분명 강자다. 특히 한국 같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자라는 이름은 타도해야 할 권력의 상징이다. 인권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더라도 남자는 대부분 강자이며 가해자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페미니스트이거나 여성 옹호론자가 아니다. 입학 상담을 하거나 가정 방문을 하면 시작은 아니라 할지라도 화두는 남편의 무능 혹은 폭력, 그리고 그 폭력의 원인은 대부분 알콜 중독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끼친다. 남자인 내가 생각해도 화가 나고 분노할 일들이 태반이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괴물을 지워야 한다앞에서 언급했듯이 강호순이나 김○○사건 같은 끔찍한 성폭행 사건이 벌어지면 나는 한동안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마치 그 끔찍한 범죄를 내가 저지르기라도 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들과 나는 분명 다르다고 속으로 무수히 되뇐다. 마치 세례를 받듯이 욕망 혹은 그런 것들을 깨끗하게 정화시킨 우물에 한동안 나를 빠뜨려 놓고 허우적대다가 빠져나오곤 한다. 그리고 속으로 수도 없이 당당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낸다. 사이코패스라고 규정되는 영화 속 주인공인 알렉스나 실제 인물인 강호순 같은 부류와 나는,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은 다르다고 말이다.
굳이 그런 설레발을 치지 않아도 그들과 우리는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순간들이 찾아오면 여전히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그리고 그 심리적 영향의 대부분은 자신은 노동자이면서 자본가 의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처럼 제 모습을 망각한 주류 방송과 언론이 안겨줬을 가능성이 높다. 방송과 언론은 이제 괴물이기보다는 제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혹시라도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김○○를 지우는 일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기자는 공부방(신흥동 푸른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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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성폭행 사건이 발생하면 난 한동안 위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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