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권하는 사회'가 당신 목 조르고 있다

[가정경제 119] 가계부채의 주범, 재테크와 신용

등록 2010.03.23 09:38수정 2010.03.2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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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ECD가 2009년 7월 5일 발표한 2010년 주요 가맹국 가계저축률 전망치.
OECD가 2009년 7월 5일 발표한 2010년 주요 가맹국 가계저축률 전망치. 문진수

2009년 말을 기준으로 가계 빚이 734조 원을 넘어섰다. 전년 대비 6.6% 증가한 수치이며, 국민 1인당 금액으로 환산할 경우 1500만 원이 넘는 액수다. 전국 아파트 시가총액의 73%, 한국 1년 예산의 2.8배, 국내총생산의 70%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을 금융기관에 빚지고 있다는 말이다. 신용누계 잔액은 2000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 이미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가계부채가 향후 우리 경제 최대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가계 빚이 줄지 않고 계속해서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짚어보기 위해 10년 전으로 시계바늘을 돌려보도록 하자.

1997년 외환위기는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냈는데, 특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2000년을 전후해 재테크 혹은 자산관리 신드롬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지금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모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외환위기 이전 두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금리의 추락은 전통적인 자금관리의 패러다임을 흔드는 뇌관으로 작동하게 된다. 퇴직금을 은행에 예치시키고 예금금리로 생활하던 시니어들은 공포에 떨며 부동산과 고수익 금융상품으로 자금을 이동시킨다. 또한 인플레이션 위험을 헤지(Hedge)하지 못하는 상품은 시장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면서 '복리의 마술'로 포장된 고수익 투자상품들이 봇물을 이루게 된다. '부자 아빠'가 되기 위한 투자열풍, 이른바 재테크 신드롬이 시작된 것이다.

이른바 '돈 버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시작된 새천년 벽두의 재테크 열풍은 더 이상 저축만으로는 안정적인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기초해 더 큰 수익률을 위한 투자대상을 찾는, 말 그대로 재무 테크놀로지(technology)에 대한 폭발적 관심으로 연결된다. 외환 위기를 통해 참담한 구조 조정 과정을 거쳐야 했던 금융권은 저금리 기조에 발맞추어 기업금융에서 소매금융으로 방향을 틀고 본격적인 대출 경쟁에 돌입한다.

이와 동시에, 소비 미덕주의를 앞세운 정부의 경기부양 정책은 국내 신용시장에 불꽃을 점화시킨다. 저금리로 인한 재테크 열풍과 소비 진작을 위한 정부의 신용 활성화 정책이 서로 맞물리면서, 국내 자본시장의 흐름이 생산에서 소비로 바뀌고 바야흐로 '소비자 금융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 신용경제에 대한 사전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속성 재배과정은 필연적으로 후유증을 양산하게 된다. 10년 전에 심어놓은, 지금 우리 경제 최대의 걸림돌이며 시한폭탄이기도 한 '개별 가정경제의 부채 증가'다. 재테크 열풍과 신용 활성화 정책이 가계 부채를 증가시킨 요인이라니, 무슨 뜻인가?

더 이상 저축만으로는 안정된 미래를 가져갈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 그리고 자산 증식을 위해서는 부채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두 가지 심리가 결합되어 이른바 '부자 되기' 머니 게임이 시작된 것이 2000년 초반이다. 당시 금융권의 화두는 '저금리와 고령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였고, 미래(노후) 위험을 과대 포장하여 '공포심'을 유발하는 금융회사들의 네거티브 마케팅이 맹위를 떨쳤다. 저축의 시대는 갔으니 하루라도 빨리 재테크를 통해 재산을 늘리지 않으면 큰일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 논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인플레이션 위험이다. (지금도 이 레퍼토리는 진행형이다.)

당시 고수익 투자상품을 권하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금리가 바닥인데, 저축을 한들 물가가 오르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매우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사실 이 논리는 틀렸다. 왜냐하면, 금리가 높건 낮건 상관없이 인플레이션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투자수단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임금 상승이 이루어지느냐'가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거시경제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 사실은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 주제를 해석하는 틀은 '금리와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실질) 임금상승률과 물가상승률'의 관계여야 한다. 근로소득 없이 오직 자본소득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고민이 될 지 모르지만, 대다수 급여소득자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재테크라고는 오직 저축밖에 모르는 '개미형' 가장이 있다고 하자. 물가가 미친 듯이 요동을 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가장이 평범한 직장에 다니고 있다면, 물가가 오르는 만큼 본인 급여도 비슷한 수준으로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부동산과 주식에 문외한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꾸준히 저축만 해왔다면, 큰돈은 벌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사는 데 큰 지장도 없었을 것이고 일정 규모의 자산도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역으로, 금리와 인플레이션을 생각하면서 고수익을 얻기 위해 무리한 투자를 했던 '베짱이'가 더 큰 위험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투자와 투기의 차이점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투자(사실상 투기에 가깝다)만 잘하면 부자가 될 것 같은 '주술'을 걸어 이른바 '묻지 마 투자'를 하게 한 결과는 어떠했는가? 다른 사례를 들 필요도 없다. 2009년 말 현재 채무불이행으로 신용불량 꼬리표가 붙은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800만 명이 넘는 저신용자(신용등급 7등급 이하)가 지난 10년간의 투자 결과 보고서다. 미래 위험을 대비하기 위한 투자가 오히려 미래 위험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적어도 외환위기 이전까지 '빚'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부채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인 정서였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정부의 신용 확대 정책이 시작되면서 빚을 지고 살아가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경제적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누가 더 큰 부채를 조달할 수 있느냐'가 마치 사회적 능력을 표현하는 기준처럼 받아들여지기까지 했다.

'빚 테크'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만큼, 많은 국민들이 부채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누군가가 빚을 권했기 때문이다. 부동산 대박 신화와 레버리지(leverage)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고, 마치 돈을 쓰지 않으면 당장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소비를 조장하고, 감당할 여력이 없는 이들에게까지 신용을 남발하여 가정경제 재정을 어려움에 빠뜨린 일등공신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정부와 기업'이다. 부동산 불패신화를 지렛대 삼고, 소비 진작을 통한 경기 활성화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과도한 신용을 제공함으로써 다수의 국민을 빚더미에 앉힌 두 장본인이다.

빚 권하는 사회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경기 불황기에는 수입이 감소하므로 지출이 줄어든다. 지출이 감소하면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경제 동력이 떨어진다. 경기 진작을 위해서는 소비를 늘려야 된다. 그런데 소득이 없으니 소비를 늘릴 방법이 없다. 이때, '보이는' 손(정부)이 개입하여 지출(재정 정책)을 확대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부 재정 확대정책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다른 방법을 추가로 동원시켜야 한다. 바로 신용 확대 정책이다. 개인 신용(부채) 확대 정책을 통해 경기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이 그것이다.

정부의 신용확대 정책이 효과를 거두려면, 신용을 제공하는 기관이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어야 한다.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제공되는 신용의 크기와 수익은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파이를 크게 만들면 위험(채무불이행)도 올라가지만, 그 위험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이익이 발생한다는 것을 유능한 대출중개인들이 모를 리 없다. 채무를 권장하는 광고들이 넘쳐나고 신용을 파는 모집원들이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 신용이 남용된다. 관리 한도를 넘어선 신용의 남용은 신용 제공자의 부실을 가져온다.

우리는 이미 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2003년 카드사태가 그것이다. 2001년 전후 '저금리시대의 개막'과 함께 카드회사들의 경쟁적인 가맹점 확보 및 회원 모집으로 시작된 신용카드 대출은 2002년도에 이르러 카드 이용실적을 전년 대비 40% 이상 끌어올리며 정점을 이룬다. 주식시장이 과열되고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중은행들이 대출경쟁에 뛰어들어 거대한 신용버블을 형성하더니 한순간 연체율의 급격한 상승과 함께 구멍 뚫린 풍선처럼 터져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신용을 남발하여 생긴 결과다.

한편, 기업은 상품을 만들고 또 팔아야 생존할 수 있다. 상품을 판매하려면 구매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소비자가 가처분 소득의 한계로 물건을 구매하지 못하면 큰일이다. 이때, 머리 좋은 누군가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일단 물건을 주고 천천히 갚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신용카드다. 그것을 할부대출이라 부르건, 신용이라 부르건 핵심은 언제나 같다. 먼저 쓰고 나중에 갚으라는 것이다. 소비와 지출을 확대하기 위한 판매 전략이다.

TV, 라디오, 신문, 잡지, 광고판 등 우리들 삶의 주변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여 수요를 창출하고자 하는 수많은 기제들로 가득 차 있다. 기업이 잠재 고객들로 하여금 상품을 구입하도록 자극하고,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활동을 마케팅이라고 부른다. 마케팅의 본질은 자사의 제품을 구매하도록 사람들을 '꾀는' 포장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놀랍도록 세련되게 가공된 광고와 마케팅은 평균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소비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고 물건을 구매하도록 만든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무엇인가를 구매하고 싶지만 돈이 없는 자에게 빚(신용)을 지더라도 돈을 쓸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준다. 이렇게 조작된 욕망은 한도를 넘어서는 소비를 불러오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채가 발생한다.

경제주체의 두 섹터(Sector)인 기업과 정부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신용을 제공해줌으로써 더 많은 물건을 사고, 필요한 것 이상의 소비를 하기를 권장하는 구조. 우리는 지금 '빚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많은 지표들이 이 명제가 단지 가설이 아니라 사실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버는 것보다 많이 쓰는 나라 1위, OECD 국가 중 저축률 최하위, 가처분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 1.4배, 국민 5명 중 1명이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져 있고 매년 10만이 넘는 가정이 법원으로부터 개인회생, 파산 등 사실상의 경제적 사망선고를 받고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지 않은가.

결국은 지는 게임일 수밖에 없는 허울 좋은 재테크와 빚 제조기나 다름없는 플라스틱(plastic) 머니가 우리 국민의 다수를 부채의 늪에 빠뜨렸다. 맹목적인 부동산 투기와 과도한 교육비 부담률로 중산층 가정경제가 시퍼렇게 멍들어 가고 있다. 제도와 법의 문제로 원인의 대부분을 돌리는 것도 문제지만, 사회적 인프라(Infra)를 무시한 채 빚과 신용의 문제를 오직 개인적 차원의 그 무엇으로 치환하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된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이 주제는 사회적, 경제적 범주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부채 권하는 사회는 언제쯤 막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진지한 얼굴로, 이 문제들의 원인을 제대로 밝혀내고 올바른 해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 세대가 안고 있는 이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대안을 지금 찾지 못한다면, 빚과 부채는 확대 재생산될 것이고 우리 아이들은 지금보다 더 척박한 환경 속에서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잠시 달리던 자전거 페달을 멈추고 생각해 볼 때다.
#가계부채 #재테크 #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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