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0.03.23 11:49수정 2010.03.23 12:13
라벤더바타케(ラベンダ畑)역. 우리나라말로 하면 '라벤더 꽃밭역'이다. 역 이름 치고는 아주 운치있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한중앙에 위치한 후라노(富良野)에서 여름에만 운영되는 임시역이다. 나는 아름다운 라벤더 농장으로 향한다는 부푼 설렘을 안고 기차에서 내렸다.
여름철 이벤트성 열차인 노롯코(ノロッコ) 열차를 밖에서 보니 라벤더 농장이 열차 몸통에 총천연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정말 어린이들 장난감같이 귀엽게 생겼다. 이 열차는 내가 정녕 후라노 팜도미타(フア-ム 富田)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노롯코 열차만 정차하는 라벤더바타케 역은 역무원도 없는 작은 역이지만 라벤더 농장으로 향하는 여행자들로 붐볐다.
역 주변의 구릉과 먼 산은 그림엽서 사진같이 예뻤다. 푸른 하늘 먼 산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푸른 하늘은 작년에 보았던 이탈리아 피렌체의 푸른 하늘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마치 비온 후 갠 날의 청량한 푸른 하늘만큼이나 하늘은 파랬다. 우리나라는 푸른 하늘이 자랑거리라고 교육받던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푸른 하늘을 서울에 복원할 수는 없는 것일까?
햇살은 약간 따가웠지만 여름날 서울의 무더위와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햇볕을 피했다. 다행히 역에서 라벤더 농장까지는 거리가 멀지 않았다. 나는 일본인 여행자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는 길을 따라서 걸어갔다. 눈앞에 보이는 구릉 위에는 총천연색 꽃밭이 펼쳐지고 있었다. 누구에게 길을 묻지 않아도 그곳은 바로 내가 찾는 팜도미타일 것이다.
5분 정도 걸어가니 팜 도미타 입구가 나왔다. 입구에서부터 해바라기 꽃밭이 우리가족을 반겼다. 여름의 햇살과 해바라기 무리는 잘 어울리고 있었다. 홋카이도의 기차 여행길에서 보면 호카이도의 넓은 산야에는 해바라기 꽃밭이 유난히 많았다. 특히 농장에서 이렇게 대단위로 키우는 해바라기 꽃밭은 잘 정돈되어 눈이 시원했다.
이 농장의 해바라기는 농장의 다른 꽃들이 비옥한 땅에서 자라게 하기 위한 거름으로 사용된다. 해바라기에는 거름이 될 기름 성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해바라기 밭은 몇 년마다 갈아엎어지고 해바라기가 녹아들어간 흙은 농장 이곳저곳에 거름으로 공급된다.
나는 아내, 딸과 함께 농장 입구의 지도를 열심히 훑어보고 한국어로 된 안내지도를 받아 들었다. 팜 도미타 안으로 들어서자 라벤더 향이 코를 간질인다. 꽃밭에서 부는 바람에 향기가 실려 오기도 하고 입구부터 늘어선 기념품 가게의 라벤더 제품에서도 향기가 넘어오는 것 같았다.
나의 딸, 신영이는 입구에서부터 신이 났다. 신영이는 라벤더 농장의 꽃도 좋고 기념품 가게의 아기자기한 라벤더 기념품들에도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아빠! 라벤더 향기 나는 방향제 너무 탐나지 않아? 집 거실에 가져다 두면 좋지 않을까? 비누도 보라색이네. 이 비누 쓰면 건강에 너무 좋을 것 같지 않아?"
"입구에서부터 기념품 사면 농장에서 내내 들고 다녀야 돼. 그리고 기념품은 항상 모든 곳을 둘러본 후에 마지막에 사는 거야. 저 앞의 다른 가게에 가면 더 예쁜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진짜 필요하고 기념이 될 만한 것이라면 아빠가 나갈 때 사줄게."
▲하나비토 꽃밭. 융단같이 가꿔진 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노시경
▲ 하나비토 꽃밭. 융단같이 가꿔진 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 노시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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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는 신영이를 설득하며 농장 안으로 들어섰다. 정녕 평화롭고 서정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하나비토 꽃밭(花人の畑)의 보라색 라벤더는 푸른색 로베리아, 연녹색 청보리, 연분홍색 소국(小菊), 노란색 유채꽃, 흰색 안개꽃, 붉은색 사루비아 꽃과 잘 어울리고 있었다. 보라색 라벤더를 중심으로 여러 색상의 꽃들이 무지개같이 경계를 이루며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꽃으로 융단을 짠 것 같은 꽃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잘 정돈된 꽃밭은 각자의 뚜렷한 개성을 맘껏 뽐내고 있었다. 신선한 공기와 거름 때문인지 꽃들의 색상은 화려하고 밝게 선명했다. 나는 이 화려한 꽃들의 색상이 따로 있을 때보다 이렇듯 서로 어울릴 때에 아름다움이 더욱 커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릇 인간관계도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들이 어울릴 때에 더 빛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팜 도미타(Farm Tomita)! 나는 농장 이름의 뜻이 궁금해서 여행 전에 팜 도미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었다. 농장 이름은 예상 밖에도 이 농장을 개척한 도미타 토쿠마(富田 德間) 부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무릇 가게나 회사에 사람의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있고 고객들에게 믿음을 가져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농장을 개간했기에 팜 도미타가 명성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팜 도미타는 무려 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도미타 부인은 1903년부터 도카치산(十勝岳)에서 이어지는 구릉지대를 개간하여 라벤더 꽃밭 등 여러 꽃밭을 만들어나갔다. 1905년부터 라벤더를 재배하였고 1920년대 말에는 향료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라벤더가 처음으로 시험재배되었다. 이후에는 그녀의 손자가 라벤더를 이용하여 오일, 향수, 비누까지 품목을 다양화하였다.
1948년에는 팜 도미타에 화장품용 향료작물이 재배되기 시작하였고 일본의 경제가 부흥하기 시작하던 1958년부터 팜 도미타 규모가 급속도로 커졌다. 1975년 일본 국철의 달력에 이 팜도미타의 아름다운 라벤더 사진이 실린 것을 계기로 일본의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는 이 농장이 TV 드라마에 등장하면서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다. 현재 팜 도미타는 약 10ha의 방대한 면적에 계절마다 라벤더, 사루비아, 양귀비, 보리꽃 등 100여 가지의 꽃들이 화려함을 자랑한다.
우리는 향기를 따라 작은 온실, 유리로 만들어진 그린하우스 속에 들어갔다. 밀폐된 공간이어서 라벤더 향은 더 강렬하게 퍼지고 있었다. 온실 안에는 농장의 예쁜이 꽃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온실 안에는 라벤더 뿐만 아니라 연분홍 빛 겨울 봉선화, 다양한 색상의 페츄니아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실외의 거대한 꽃밭들이 자연에 대한 경외의 대상이 된다면 이 실내 온실의 작고 아름다운 꽃들은 나의 소유욕을 강하게 자극했다. 아마도 이곳이 한국이었다면 아파트 베란다에 키울 꽃들을 사기 위해 계속 지갑을 열었을 것이다.
그린하우스를 나서니 눈앞에는 광활한 라벤더의 보라색 물결이 장관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도 내가 찾고자 했던 예쁜 꽃 하나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팜 도미타에서만 기를 수 있다는 유명한 붉은 양귀비꽃이었다. 양귀비꽃을 포털에서 검색하여 꽃의 이미지는 머리 속에 입력시키고 왔지만 농장 어디에서도 양귀비꽃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양귀비꽃의 개화시기인 6월을 지나서 농장에 왔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포푸리 하우스(ポプリの舍)에 들어섰다. 1983년에 문을 열었으니 팜 도미타에서 가장 오래된 휴게소다. 가게 안에는 라벤더 향기가 가득 퍼져 있었다. 보랏빛 치마를 입은 인형 등 팜 도미타에서만 판매되는 앙증맞은 제품들이 가게 여기저기에 있었다. 하지만 포푸리 하우스 입구에서부터 우리 가족의 구미를 당기는 것은 다름 아닌 라벤더 아이스크림이었다. 여행 명소의 명품 먹거리들은 꼭 먹어주어야 하는 것이고 라벤더 아이스크림은 꼭 팜 도미타에서 먹어야 더 맛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라벤더로 만든 아이스크림 컵은 200엔, 아이스크림 콘은 250엔, 아이스크림 푸딩은 280엔이었다. 가격을 고려한다면 아이스크림 컵의 양은 많지 않고 작아보였다. 우리는 모두 아이스크림 컵을 골랐다. 처음 보는 부드러운 보랏빛의 아이스크림이 특이했다. 나는 팜 도미타에 오기 전부터 이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꼭 맛보고 말리라고 생각을 했었다.
아! 아이스크림의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살랑살랑 입속으로 퍼졌다. 거기에 맛이 진하기로 유명한 홋카이도의 유제품이 부드럽게 녹아있었다. 입 안 가득히 들어선 라벤더와 우유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혀에서 새로 접해보는 맛이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다. 라벤더 아이스크림의 맛은 전혀 달지도 않았고 너무 부드럽고 깔끔했다. 우리 가족의 아이스크림을 먹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먹는 속도가 느린 신영이 손 위의 아이스크림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아쉬움이 남는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뒤로 하고 포푸리 하우스 옆의 오두막집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은 일본에서 유일하다는 라벤더를 증류하는 집(蒸溜の舍)이었다. 7월부터 8월의 라벤더 개화기에 운영되는 증류사는 농장에서 수확한 라벤더를 증류하여 라벤더 증류수, 즉 라벤더 오일을 추출하고 있었다.
농장 직원들은 트랙터에 가득 실어온 라벤더를 내리고 있었다. 라벤더 다발의 거대한 향기가 훅 하고 나의 코를 엄습했다. 잘 말려진 라벤더를 증류통에 넣은 후 증류수로 짜는 전 과정이 여행자들 앞에서 직접 행해지고 있었다.
움직임을 멈추고 그 과정을 지켜보던 신영이의 질문이 많아졌다. 나는 내가 평일에 나가는 회사에서 배웠던 증류에 대한 지식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짧은 일본어로 증류기계 앞의 설명문을 신영이에게 읽어줬다. 라벤더를 증류하는 집(蒸溜の舍)은 결국 라벤더 오일을 판매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에서 나온 곳이겠지만 어린 아이들에게는 유익한 현장학습의 장이었다.
나는 다행히도 팜 도미타의 꽃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7월말 어느 날의 오전에 이곳에 서 있었다. 농장의 대표 꽃, 라벤더는 7월에 절정을 이루고 8월이 되면 소위 끝물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8월이 오기 전 어느 날, 이 농장 안으로 들어왔다. 라벤더는 가장 아름다웠고 여행자들은 라벤더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며 만족해하고 있었다. 나를 둘러싼 여러 꽃밭의 만개한 꽃들은 한여름을 장식하고 있었다.
사키와이 꽃밭(倖の畑)은 짙은 보라색을 자랑하는 라벤더의 날씬한 꽃망울들로 온통 채워져 있었다. 농장 가장 안쪽의 가을빛 꽃밭(秋の彩の畑)은 왜 이름을 가을빛이라고 붙였는지 의아할 정도로 화려한 꽃밭이었다. 여름의 햇살에 가장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꽃밭이었다. 8월이 가까워 옴에도 라벤더는 보랏빛 선명하고 사루비아는 마치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이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 아무리 훌륭한 사진으로 이곳을 보여주어도 지금 눈으로 보이는 것만큼 아름다움을 담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라벤더의 보랏빛과 사루비아의 정열적인 붉은 물결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가을빛 꽃밭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도 라벤더 꽃과 같은 보랏빛 작업복을 입고 있어서 더욱 운치가 있었다. 너무나도 깔끔하게 정돈된 꽃밭과 사람들은 인공의 미를 만들었지만, 인공의 대상이 아름다운 꽃들이라서 자연의 푸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들어 언덕 아래를 보니 시원스런 도카치다케(十勝岳) 봉우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드넓은 농장 멀리 연봉의 봉우리들이 내 마음을 탁 트이게 한다. 나는 어떤 화가도 결코 그릴 수 없는 경치를 보며 라벤더의 향기를 음미하고 있었다. 라벤더의 향기 속에 내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러나 평안한 마음을 계속 어지럽히는 머리 속의 생각이 있었다. 팜도미타를 왕복하는 노롯코 열차는 하루에 왕복편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열차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꽤 많은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는 사실. 팜도미타에서 비에이역(美瑛驛)으로 올라가는 다음 노롯코호 기차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아쉬움이 쌓여갔고 압박감이 밀려왔다.
"아빠! 왜 벌써 나가? 아직 저 곳도 못 본 것 같은데. 더 보고 허브 기념품도 사가지고 가자."
나는 더 구경하고 가자는 신영이를 겨우 설득해서 농장 밖으로 나왔다. 방금 전까지 들떠서 즐거웠던 신영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다시 라벤더바타케(ラベンダ畑)역. 그늘 하나 없는 간이역에 서자 햇살이 살을 파고 들었다. 역에서 노롯코호를 기다리면서, 팜 도미타를 여유롭게 감상하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3.23 11:49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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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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