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서 다각도에서 그의 삶을 조명한 책이 출간되고, 다양한 행사가 마련되어 진행되고 있다.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항일 독립군 등으로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살아왔던 안 의사, 을사조약을 주도하고 주권을 강탈하는데 앞장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32년의 짧은 삶을 마감했던 그분의 고귀한 뜻을 되새기기 위한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위해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 11일간 머물렀다.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없애기 위한 거사는 서른 두 해 살아온 삶을 마감해야하는 결단이기도 했다. 하얼빈의 11일 동안 안 의사는 어떤 심정으로 거사를 준비하고 자신의 삶을 정리했을까.
그 11일간의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따라 하얼빈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온몸으로 시대의 모순에 저항했던 뜨거운 삶과, 숨 가쁘게 진행되던 동아시아의 정세를 다큐 형태로 생생하게 재현시킨 <안중근, 하얼빈의 11일>이 출간되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기울어가는 조선의 청년으로 살아야했던 안중근,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국주의 일본에서 입신출세의 길을 달렸던 이토 히로부미, 두 사람의 삶은 1909년 10월 26일 극적으로 엇갈렸다.
동양 평화를 지키려는 청년의 총격으로 동양 정복에 앞장섰던 노회한 정객은 숨을 거두었다. 뜻을 이룬 청년은 1910년 3월 26일 교수형으로 세상을 떴다.
다양한 자료가 녹아든 이야기 형태의 서술로 이해가 쉽고 재미가 있어 속도감 있게 읽히는 장점이 있다. 때로는 안중근의 시선으로, 때로는 이토 히로부미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안중근의 삶과 사상, 이토 히로부미의 행적을 중심으로 아시아 정세 변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남아 있는 아쉬움 몇 가지
<안중근, 하얼빈의 11l일>은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쉬움 또한 남는 책이다. 먼저 안중근 의사가 부친 안태훈과 함께 황해도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했던 적이 있는데 이와 관련된 책 내용을 살펴보자.
의병들의 모습을 보고 안중근은 그만 물러가고 싶은 마음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의병들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토벌한 동학군을 빙자한 폭도들의 모습과도 많이 겹친다. 하지만 '이미 내친 걸음'이라 일본군과 전투를 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넌다. 적군이었던 일본군은 유럽식으로 잘 훈련받은 제국주의 군대였다.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41쪽)
안중근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했을 당시 책의 내용처럼 동학군을 빙자한 폭도라 생각하며 토벌했을까. 아니면 동학농민군 자체를 폭도라 생각하고 토벌했을까. 동학군을 빙자한 폭도라 생각했다면 동학군에는 감정이 없지만 그를 빙자한 대상들을 토벌했다는 얘기가 된다. 과연 안중근은 동학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출간에 참고했던 문헌 중 하나인 김삼웅의 <안중근 평전>의 내용을 토대로 그 답을 찾아보자.
안태훈은 일찍이 개화파 세력에 가담한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의 일이지만 천주교로 개종하고 적극적으로 전도사업을 벌일 만큼 서구 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개화파였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안태훈의 반동학(反東學)적 입장은 개화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개화와 동학이 이념적 지향을 달리함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개화와 동학의 상반된 입장은 이념적 지향의 차이에서 오는 피치 못할 갈등이기도 했다. '반봉건'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모두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반봉건'의 실천논리에서 이들은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안중근 평전> 62-63쪽)
부친과 함께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섰던 안중근의 생각 역시 부친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개화파 지식인이었던 안태훈도, 그의 아들 안중근도 동학과 농민군 모두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동학도 농민군도 모두 폭도였고 그래서 토벌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물론 <안중근 평전>에서도 마지막 연보 부분에서는 '부친을 도와 동학을 빙자, 양민을 괴롭히는 무장 폭도들을 진압'이란 대목이 나온다. 앞부분의 서술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다. 안중근의 삶에 대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연구가 더 많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들이다.
두 번째는 안중근 의사의 명칭이 통일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안중근이란 이름만 나타나지만 어떤 곳에서는 안중근 장군으로 어떤 곳에서는 안중근 의사로 등장한다. 어떤 명칭이 더 타당하고, 어떤 명칭이 부적절한지에 대한 논의를 떠나서 한 사람의 작가가 쓴 책에서조차 명칭이 통일되지 않았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작가 한 사람이 모두 짊어져야 할 문제는 아니다. 지금까지 안중근에 대한 연구가 치밀하고 다양하게 진행되지 못한 탓이다.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맞아 다방면에서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는 행사나, 연구 서적의 출간 등 외면적으로 보이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안중근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이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란 생각이 든다.
100주년을 맞아 일시적으로 부각되었다가 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마는 반짝 연구가 아닌 치밀하고 꾸준한 연구를 통한 올바른 자리매김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원재훈 지음,
사계절,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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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 올바른 자리매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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