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자와의 가슴 설렌 사랑, 9년째

[내맘속의 꽃1]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우울증을 극복하게 한 명자나무

등록 2010.04.04 11:45수정 2010.04.05 11:0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꽃도 예쁘지만 봉오리자체로도 꽃인 명자나무 꽃봉오리(2010.3.29 경기도 고양시)
꽃도 예쁘지만 봉오리자체로도 꽃인 명자나무 꽃봉오리(2010.3.29 경기도 고양시)김현자

'명자나무를 울안에 심으면 그 집안의 아녀자들이 바람난다'는 속설 때문에 옛 사람들은 명자나무를 울 밖 집 가까운 곳에 심어두고 꽃을 즐겼다는 이야기를 나무의사 우종영씨의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란 책에서 처음 읽었다. 책을 통해 이러한 속설을 만나면서 이야기 지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에 불과한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책을 통해 이러한 속설을 알게 된 그 이듬해 봄에 이 꽃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몇 년 동안 거의 매일 이용하던 그 길, 버스를 기다리며 5분 혹은 10분 가까이 서성이던 버스 정거장에서. 관심을 두자 비로소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바로 이 즈음이었다. 명자나무는 이처럼 꽃보다 더 예쁜 꽃망울과 앙증맞은 잎들을 조록조록 막 틔워 올리고 있었다. 꽃샘추위 속에 내리는, 봄비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명자나무는 팥알 만한 꽃봉오리들을 옹골차게 틔워내고 있었다.

 명자나무 새순(2010.3.29 경기도 고양시)
명자나무 새순(2010.3.29 경기도 고양시)김현자

명자나무를 처음 만나던 그 무렵,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시시때때로 우울해지곤 했다. '인생 70의 그 절반을 이미 살았건만 이룬 것 하나 없다'는 자책감이 시시때때로 들곤 했다. 친구들 형편과 내 형편이 자꾸만 비교됐다. 그럴 때마다 나오는 것은 한숨과 자책뿐.

'인생은 마라톤과 같은 거야. 조금 뒤처져 가고 있을 뿐이야. 남과 비교하지 말자. 나만의 삶이 있잖아. 눈에 보이는 것만이 삶의 성공 여부는 아니잖아?…. 그래 힘내자.'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이런 위안도 잠시뿐, 다시 무겁고 우울한 자책만 거듭 될 뿐이었다. 무엇도 하지 못하고 이유없이 서성거리다가 맥없이 끝도 없는 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우울증의 시작이었단 생각에.


와중에 늘 이용하던 길 한 모퉁이에서 이른 봄날 꽃봉오리와 새순을 막 틔워 올리고 있는 명자나무를 만나게 된 것이다. 관심이 없어 보이지 않았을 뿐, 몇 년 동안 오고가던 그 길  모퉁이에 지난해, 지지난해, 그 훨씬 전부터 때가 되면 어김없이 피고 졌을 명자나무였다.

하루하루 명자나무를 만나는 일이 점차 기분 좋은 일상이 되었다. 점차 명자나무는 물론 그 주변까지 신비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 그 설렘이었다.


사실 책을 통해 명자나무의 존재를 처음 알았고 인터넷검색으로 꽃의 생김새를 봤던지라 거의 매일 가슴 설레며 만나는 꽃봉오리가 그토록 궁금해 하는 명자나무의 것이란 걸 전혀 몰랐다.

거의 한달 가까이 명자나무 무더기를 만나는 동안 몇 차례의 꽃샘추위가 지나갔고 봄눈과, 봄비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비도 몇 차례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명자나무는 작고 야무진 꽃봉오리와 새순을 계속 밀어 올리고 있었다.

도무지 앙 다물고 벌려줄 생각을 하지 않는 명자나무 꽃봉오리를 매일 만났다. 어떤 날은 명자나무 곁에서 서성이며 버스를 그냥 보내기도 했다. 어쩌다 집에서 쉬던 날, 매일 만나던 명자나무의 안부가 궁금해 옷을 주워 입고 들여다 보고 오기도 했다.

 명자나무꽃(2009.4.12. 강남 봉은사에서)
명자나무꽃(2009.4.12. 강남 봉은사에서)김현자

참으로 오랜 기다림 끝에 명자나무가 한 송이 한 송이, 정신없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참으로 붉디붉은 꽃이었다. 기다림이 너무 길었던 걸까. 꽃샘추위 속에도 꿋꿋하게 꽃봉오리들을 틔워 올린 대견함 때문일까. 붉디붉은 명자나무의 꽃은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리고 비로소 알았다. 내가 그토록 가슴 설레며 만나던 꽃봉오리가 피워낸 꽃이,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만나고 싶던 꽃이 아녀자를 바람나게 한다는 속설의 그 명자나무 꽃이란 걸. 그리고 비로소 알았다. 명자나무에 이런 속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그래, 다시 열심히 뛰어 보는 거야. 다른 사람들보다 가진 것 적다고 움츠리지도 말고 주눅 들지도 말고 일단 열심히 살아보는 거야. 그래. 세상과 삶과 지독한 사랑에 빠져보는 거야. 일단 열심히 살아 보는 거야. 그래 미쳐보는 거야. 늘 그 자리에서 누가 봐주든 안 봐주든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피웠을 명자나무처럼, 꽃샘추위 속에서도 꿋꿋이 꽃봉오리를 틔워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운 명자나무처럼.'

명자나무가 꽃샘추위 속에 피워 올린 꽃봉오리로 시작된 주변에 대한 관심과 그 관심으로 시작된 설렘은 세상 또 다른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점차 번졌고,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하루하루의 삶이 즐거워졌다.

명자나무 꽃이 만개하고 질 무렵, 마침 봄꽃들이 여기저기 막 피어나기 시작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피운 꽃들이었다. 아직 두툼한 겨울옷을 벗지 못하고 있는 내게 환하게 피어나는 꽃들은 세상을 향해 가슴을 활짝 펴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우울하게 했던 '인생 70의 절반에 이르렀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살았다는 자책'이나 삶에 대한 지루함 따위는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아니 이제는 잠시도 주춤거릴 여유가 없다.

 눈속에 맺은 명자나무 꽃봉오리(2008.1.11 보라매공원 기상청쪽)
눈속에 맺은 명자나무 꽃봉오리(2008.1.11 보라매공원 기상청쪽)김현자


 1월에 맺은 명자나무 꽃봉오리(2008.1.9. 보라매공원)
1월에 맺은 명자나무 꽃봉오리(2008.1.9. 보라매공원)김현자

명자나무를 만나기 시작한 세 번째 봄, 명자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던 무렵에 화재가 났다. 그로부터 이년 후, 계속된 불황으로 가게까지 접어야만 하는 시련이 있었다. 명자나무 덕분에 시시때때로, 밑도 끝도 없이 몰아치던 우울을 치유하지 못했다면 그 시련들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로부터 몇 년째 명자나무를 만나고 있다. 해마다 봄인가 싶으면 명자나무의 안부가 궁금해 주변의 명자나무에게 다가가 꽃봉오리를 만나곤 한다. 명자나무와 사랑을 시작하던 그해 만큼이야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슴 설레게 하는 명자나무의 꽃봉오리다.

 꽃도 예쁘지만 봉오리자체로도 꽃인 명자나무 꽃봉오리(2010.3.29 경기도 고양시)
꽃도 예쁘지만 봉오리자체로도 꽃인 명자나무 꽃봉오리(2010.3.29 경기도 고양시)김현자

명자나무의 고향은 중국이란다. 공원이나 학교, 가로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대개 무더기로 심어져 있다. 관상 가치가 높아 다양한 품종으로 개발돼 분홍색과 흰색도 있다. 꽃이 진후 모과와 많이 닮은 열매가 열리는데 크기는 살구나 자두 만하다.

꽃과 달리 열매는 몇 개 열리지 않는다. 명자나무의 열매는 모과처럼 향이 좋고 살균력이 있기 때문에 자동차 안에 한두 알 두면 좋다. 명자 열매를 옷장에 넣어두면 벌레와 좀이 생기지 않는다. 옛날 사람들은 명자를 좀약 대용으로 사용했단다.

다시 봄이다. 꽃도 예쁘지만 봉오리 자체로도 한 송이 꽃인 명자나무 꽃봉오리를 이 봄에도 날마다 다시 만난다. 어제 만났고 오늘 다시 만났기 때문에 눈에 띄는 변화는 없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명자나무는 활짝 꽃피울 날을 향해 어제보다 조금 더 걸었으리라. 명자나무는, 명자나무 꽃은 내게 이런 존재이다.

덧붙이는 글 | ※나무의사 우종영의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2001년 3월 출간, 2009년에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나무의사 우종영의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2001년 3월 출간, 2009년에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습니다.
#명자나무 #모과나무 #봄꽃 #꽃봉오리 #우울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1만2000 조각 났던 국보, 113년만에 제모습 갖췄다 1만2000 조각 났던 국보, 113년만에 제모습 갖췄다
  2. 2 [단독] 김태열 "명태균이 대표 만든 이준석,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단독] 김태열 "명태균이 대표 만든 이준석,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3. 3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4. 4 대학 안 가고 12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됐다 대학 안 가고 12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됐다
  5. 5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