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흥국사 만월보전 팔상도-수하항마상 부분
권중서
남양주 흥국사 만불보전의 수하항마상 일부분이다. 수하항마상은 부처님의 일생 중 가장 굵직한 사건을 8장면으로 표현한 팔상도 여섯 번째 그림이다. 부처님이 깨달음 직전에 세상의 온갖 번뇌와 유혹, 괴로움 등을 이기는 그 순간이다.
초등학교 운동회의 줄다리기를 떠올리게 하는 이 그림은 썩 재미있다. 파랗고 길쭉한 병 하나를 쓰러뜨리겠다고 마왕(악마)의 부하들이 이 난리들이다.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이뤄 중생들을 구하면 마왕(악마)에겐 그만큼 불리할 것이라, 그동안 온갖 방법으로 부처님의 수행을 방해하던 마왕 파순은 마지막 카드를 제시한다. 무력으로라도 부처님의 깨달음을 막고자 자신의 군대를 동원한 것이다.
부처님은 '마왕일지라도 살생해선 안 된다. 자비로 응대하자'라며 깨달음의 상징인 보병을 마왕에게 내밀며 조건을 제시한다. "너희들이 이 보병을 쓰러뜨리면 나는 깨달음을 이루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리하여 이 그림과 같은 장면이 연출되고야 만다.
마왕의 군대는 "얼씨구나 좋다" 하고 여러 갈래의 밧줄을 보병에 걸고 마왕 파순의 진두지휘 아래 줄다리기를 한다. 얼굴이 붉어지고 팔다리 근육이 불끈불끈 솟아오른다. 보병주둥이를 잡고 바깥다리 거는 놈, 힘을 모으기 위하여 북을 치며 격려하는 놈, 빨리 당기라고 꽹과리를 두들기며 독촉하는 놈, 뒤로 나자빠지는 놈, 밧줄에 매달리는 놈 등등 수십 수천의 마왕 무리들이 신나게 줄다리기 전쟁을 한다. 오직 대상은 보병 하나뿐인데 이렇게 쩔쩔 매다니 어느 초등학교 운동회 구경보다 재미있고 신나며 해학적이다. 무기를 쓰지 않고 오직 밧줄에 목숨을 건다.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안 것일까? 죽자, 살자하는 전쟁판이 아니라 떠들고 웃고 즐기고 노는 모습에 여유가 넘쳐흐른다. 인간의 전쟁도 이런 방법으로 하면 지구도 살고 사람도 사는 것 아닐까? - 책 속에서종교그림인지라 일반인들에게 낯설 수밖에 없는 그림이지만 보병은 우리가 이뤄야 하고 지켜야 하는 목표나 규칙이요, 마왕과 그 졸개들은 목표를 향해 가는 동안 끊임없이 이겨내야만 하는 온갖 유혹 정도로 바꿔 생각하면 이 그림은 훨씬 의미 있게 다가오리라.
보병 하나 쓰러뜨리느냐 못하냐에 따라 세상의 '선(善)'과 '악(惡)' 그 순도가 결정된다. 그러니 마왕과 그 졸개들이 어떻게든 이겨야겠다고 이 난리들인 것이다. '보병이 쓰러지느냐 끝까지 버텨 주느냐?'에 따라 개인의 성공여부가 달려 있다는 해석은 어떨까.
팔상도는 사찰 전각의 벽화나 탱화로 그려진다. 수하항마상 중에는 마왕이 자신의 딸을 보내 유혹하는 장면도 있는데, 재미있게도 남양주 흥국사의 이 그림 속 마왕의 딸은 못생긴 중년 여인이다. 아리따운 여인이 유혹해도 턱 없는데 왜 그렇게 못생긴 중년의 여인을?
종교 그림이라 우선 어렵고 딱딱하고 근엄하게만 여겨지는 그림일 수 있지만 불교미술 중에는 이처럼 해학적인 것들이 많다.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보물 1041호) 외에 다수의 팔상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장난 좀 그만 쳐라, 부처님 말씀 중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