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허세욱 씨의 죽음은 이 시대 '깨어있는 양심'들의 가슴을 울렸다. 범국민추모제에서 애통해하고 있는 참가자들.
노동세상
하나의 깨우침은 또 다른 깨우침을 낳았다.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적나라한 폭력이 난무한 철거투쟁에서 세상을 본 허씨는 계속 알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사는 터전을 지키는 일에 나섰던 그는 바로 일하는 터전을 위해 일어섰다. 소속돼 있던 한독운수노조가 상급단체를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바꾸는 투쟁에 함께 한 것.
곧 이어 참여연대, 민주노동당에도 가입했다. 자신이 겪은 강제철거 뒤엔 사회구조적인 모순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였다. 또한 그는 미군장갑차에 치어 숨진 두 여중생 효순·미선 투쟁,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 요구 투쟁을 겪으면서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평화와 통일의 문제와 따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데도 눈을 떴다. 그런 투쟁에 빠지지 않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이란 단체에도 가입한다.
박석민 민주노총 교육국장은 허씨를 떠올리면 "오늘도 잘 배우고 갑니다"란 말이 떠오른다고 했다. 집회 때면 꼭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집회가 모두 끝나고 나면 실무자들이나 어른들한테 허리를 굽히고 두 손으로 악수를 하면서 잘 배우고 간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고. 박 국장은 '민족민주노동열사 허세욱 정신계승사업회' 집행위원장이기도 하다. 정신계승사업회는 허씨의 삶을 보여주듯 민주노총, 참여연대, 평통사, 민주노동당이 결합돼 있다.
투쟁의 현장도 허씨에겐 배움터였다. 그는 두 번이나 홀로 택시를 타고 매향리 폭격장에 찾아갔다. 전경이 그 소리에 놀라 방패를 떨어뜨릴 정도로 어마어마하다는 폭격소리를 직접 들었다. 효순, 미선양이 살해된 현장에도 직접 택시를 몰고 갔다. 그렇게 미군의 실체를 속속들이 파악했다. 그 뒤 일반 시민들은 이름조차 낯선 한미안보협의회(SCM), 한미안보정책구상회의(SPI) 규탄 농성이나 기자회견들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허씨는 앞서 소개한 <참여사회>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집회장엔 상하도 없고 너와 나도 없습니다. 오직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힘만이 있을 뿐이죠. 일한 만큼 대접받는 사회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남을 돕느라 정작 자신은 끼니 굶어택시로 하루 340여km씩 한 달을 꼬박 몰아 허세욱씨가 손에 쥔 돈은 100만 원 남짓이었다. 허씨는 그 돈의 상당수를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썼다. 동네에 혼자 사는 노인들을 돌보고 소년소녀가장들을 도왔다. 관악주민연대, 참여연대 등 각종 시민사회단체 회비를 내고, 단체 활동가들의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부지런히 챙겼다. 그러느라 정작 자신은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았다.
유종대 한독택시분회 대외협력부장은 "허세욱 형님은 참 정이 많으신 분이었어요"라고 했다.
"제가 살던 곳이 공원이 되는 바람에 이사를 하게 됐어요. 이사하고선 형님한테 '저 이사했습니다' 한 마디 했죠. 저녁에 일 나가려고 택시 트렁크를 열었는데 화장지 두 묶음이 들어있는 거예요. 누가 갖다놨나 생각해 보니 허세욱 형님밖에 없더군요. 그 이튿날 형님한테 '화장지 갖다 놓으셨죠?'라고 물으니까 '아니, 뭐 그걸 얘기를 해. 내가 가보지도 못하고 해서….'라고 하시더라고요." 허 씨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도 않았다. 유 부장은 술자리에서 허씨가 얼핏 지나치듯 하는 얘기를 통해 그가 혼자 사는 노인분들 라면도 사다 드리고 공짜로 택시도 태워드리곤 했다는 것을 알았다고했다.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의 빈자리가 큰 법. 유 부장은 출근할 때면 꼭 한독운수 사내에 있는 허세욱 기념관에 들린다고 했다. "청소는 잘 돼 있는지 형님이 남긴 물건들은 잘 있는지 확인할 때마다 허세욱 형님이 생각나요"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배우고... 실천하고... 또 실천하고...'달리는 민주노동당'이라고 불렸던 허씨는 생활이 곧 '운동'이자 '실천'이었다. 택시 손님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손님들과 끊임없이 사회 이슈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일 끝내고 봉천동 셋방으로 가는 새벽길까지 남은 유인물들을 집집마다 넣으면서 실천을 이어갔다.
많은 단체에 가입했던 허씨는 '그냥 회원'이 아니었다. 평전 작업을 위해 허씨가 활동했던 단체들을 찾았던 송기역 작가는 모든 단체에서 "허세욱님은 회원이 아니라 활동가셨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자신은 그냥 회원의 활동을 한 것이겠지만 어느 회원도 그처럼 열성적으로 강연을 찾아다니고 집회에 빠짐없이 참여를 하지 못하니 그가 도드라진 것은 당연할 수밖에.
허씨의 작은 단칸방엔 각종 강연 때 빼곡히 필기한 노트, 각종 신문 스크랩 등이 남겨졌다. 송 작가는 그의 삶을 "끊임없는 자기 극복, 자기 갱신의 삶"이었다고 칭했다. '허씨는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늘 배울 곳을 찾았고 스스로 공부했다. 말주변이 없는 콤플렉스도 그렇게 고쳐 나갔다.
"허세욱님은 말투가 어눌하고 표현을 잘 못하셨어요. 그런데 2007년 평택 대추리의 희망이 사라져갈 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도 논리적이고 꽤 잘하게 돼요. 그만큼 노력한 결과겠죠." 송 작가는 허씨의 변화상을 전해줬다.
"당시 그분은 의식이 다른 차원으로 건너갔던 것 같아요. 모든 걸 걸고 저항의 길을 걸어왔던 한 평범한 시민의 입이 확 열린 거죠. '한미FTA를 폐기하라'고 말해야 하니까…."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 허씨는 대학에 가고 싶어 했다. 2006년에 잠깐 고등학교 검정고시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열심히 할 수가 없었다. '그 놈의 대추리 때문에…, 그 놈의 FTA 때문에….' 그는 "싸워야 하는데 잘 시간이 어디 있냐?"고 했던 사람이다.
세상을 뒤흔든 택시노동자의 경적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