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희귀 미술품을 구매하는 과정을 문제 삼아 계약직공무원으로서의 복무상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김윤수(74)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해임한 국가의 처분은 부당하다는 판결이 나왔다.
김윤수 전 장관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채용계약을 맺었는데, 임기만료(2009년 9월)를 1년여 앞둔 2008년 11월 계약해지를 통보받았다. 당시 문화부는 김 전 관장이 마르셀 뒤샹의 작품인 <여행용 가방>을 사들이면서 계약 체결 전 구매결정 사실을 중개사에 알리고, 관세청에 신고하지 않는 등 관련 규정을 위반했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문화부가 해임처분의 근거로 삼았던 계약해지의 중요 부분은 모두 항소심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채용계약 해지 무효확인 소송을 냈다가 지난해 7월 1심(서울행정법원)에서 패소한 김 전 관장은 항소심 진행 중에 관장으로서 채용계약기간이 끝나자 '미지급 급여'를 구하는 것으로 청구 취지를 변경했는데, 서울고법 제9행정부(재판장 박병대 부장판사)가 김 전 관장의 손을 들어준 것.
재판부는 김 전 관장이 국가를 상대로 낸 계약해지무효확인 청구소송에서 "채용계약 해지는 효력이 없어 무효"라며 "따라서 계약해지 이후 계약기간 만료 시까지의 급여 합계 8193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한 것으로 14일 확인됐다.
작품수집지침 제4호 및 제8호 위반 여부
재판부는 김 전 관장이 2005년 5월30일 미술품 중개상 R사에게 '국립현대미술관은 마르셀 뒤샹의 <여행용 가방>이 사건 미술품을 구입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 담긴 공문을 보낸 사실을 인정했다. 국가는 계약체결 전에 구입 결정사실을 알린 것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김 전 관장은 공문에서 미술품에 대한 진위 확인과 가격협상이 선행돼야 함을 조건으로 제시한 점, 공문의 내용에 비추어 국립현대미술관이 향후 가격협상에서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되거나 어떠한 법적인 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아닌 점에 주목했다.
또 이미 R사는 2차례에 걸쳐 김 전 관장에게 5월31일까지 미술품 구입 여부를 알려달라는 통지를 했는데,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위 작품을 구매할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만일 공문을 보내지 않았다면 R사는 다른 미술관 등에 작품을 매도할 가능성이 있어 공문을 발송할 필요가 있었다고 봤다.
이에 재판부는 "이런 제반 사정을 고려하면, 김 전 관장이 공문을 보낸 행위가 '작품 수집의 가부를 미리 약속한 것'이라거나 '최종 수집결정 이전에 심의결과 및 내용을 외부에 유출시킨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며 국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술품에 대한 제안가격 및 구입가격 결정상의 잘못 여부
국가는 또 "김 전 관장이 미술품 가격에 대한 충분한 조사를 거쳐 작품수집심의위원회에 제안가격을 상정하고 구입가격을 결정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미술품의 최종 구입가격이 객관적으로 적정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으나, 이 사건 미술품 수집여부에 대한 심의 및 구입가격의 결정과정에서 김 전 관장이 임무를 소홀히 하거나 규정을 위반하는 등 뚜렷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규정하기는 어렵다"고 반박했다.
그 이유는 먼저 <여행용 가방> 미술품은 전 세계적으로 수량이 한정돼 있고,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예술성과 보존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는 예술품의 가격을 객관적이고 일률적으로 산정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또 외국에서 뒤샹의 <여행용 가방> 시리즈의 작품이 미술품 경매를 통해 일부 거래된 사례가 있기는 하나, 이 사건 미술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 거래된 사례는 발견되지 않고, 뒤샹의 작품은 국내에는 단 한 점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없었고, 게다가 이 사건 미술품은 오로지 단 한 점뿐이므로 시장가격이 존재하지 않으며, 전문가의 시가 감정조차 쉽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재판부는 "김 전 관장이 이 사건 미술품에 대한 감정가격, 유사한 거래실례 가격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계약상대방인 R사로부터 직접 제안 받은 견적가격을 기준으로 예정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위법하다고 볼 수는 없다"며 "게다가 구입 작품의 적정가격을 산정하는 것은 국립현대미술관 전체심의위원회의 업무로서 오로지 김 전 관장에게만 가격결정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판시했다.
아울러 "김 전 관장이 미술품 거래과정에서 뒤샹 작품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나OO 박사로부터 진품을 확인한 점, 비록 우편을 통해 거래되기는 했으나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술품을 매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그동안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한 미술품 매입이 부적절하다고 지적된 바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계약법 시행규칙에도 계약서 양식에 대한 재량을 인정하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단지 김 전 관장이 미술품 계약에 있어 '표준계약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국가계약법 시행규칙을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관세법 위반 여부
재판부는 <여행용 가방> 미술품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김 전 관장의 요청으로 최종적인 구입계약체결 이전에 국내로 반입돼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 보관됐는데, 그 통관 과정에서 세관장에게 신고가 되지 않은 사실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 사건 미술품은 세율이 0%인 무관세 품목으로서 굳이 부당한 이득을 얻기 위해 세관장에게 신고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 위임 전결 규정상 작품의 운송 및 통관은 학예실장의 전결사항인 점, 비록 위 미술품의 통관과정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측이 확인의무를 소홀히 함으로써 다소 부적절한 업무처리가 됐다고 하더라도 이를 이유로 미술관장인 원고에게 곧바로 관세법위반의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관세법위반죄의 죄책을 묻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채용계약의 기초가 된 신뢰관계의 파괴 여부
국가는 위와 같은 여러 사유를 들어 김 전 관장이 국가공무원법 제56조가 정한 법령의 준수 및 성실의무를 위반했고, 또 계약직공무원규정 제7조 제4호가 정한 복무상 의무를 위반했으므로, 이로써 채용계약의 기초가 된 신뢰관계가 파괴된 만큼 해임처분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원고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서 <여행용 가방>을 구입함에 있어 통관절차에 다소 부적절한 업무처리가 된 것을 미리 막지 못한 점 정도를 제외하고는 달리 비난할 만한 사유가 있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국가공무원법이나 계약직공무원규정이 정한 복무상 의무를 위반했다고 할 수 없다"며 "따라서 원고가 계약상의 의무를 위반함으로써 채용계약의 기초가 되는 신뢰관계가 파괴됐음을 전제로 한 피고의 채용계약 해지는 효력이 없다"고 판시했다.
2010.04.14 16:45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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