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당 선생의 본가 터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김철관
참고로 서계 박세당(朴世堂, 1629∼1703) 선생은 조선후기 문신으로 실학자이다.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했으며, <색경>이라는 농사서적을 저술하기도 했다. 유교경전 중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서경에 대한 주해서를 집필한 <사변록>을 저술해 주자 사상(우암 송시열 등)과 대립했고, 결국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낙인찍혀 유배를 가가도 했다. 저서로는 <사변록(思辨錄)>, <색경(穡經)>, <서계집(西溪集)> 등이 있다.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서계(西溪)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좌참찬 동선(東善)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炡)이다.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인 양주 윤씨(楊州 尹氏)와 결혼했다.
1660년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제수돼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병마평사 등의 내외 관직을 역임했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일시 다녀왔지만 당쟁을 혐오하며 관직을 그만두고 양주 석천동(지금 의정부 장암)으로 물러났다. 한때 통진 현감으로 나가 백성들의 구휼에 힘쓰기도 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두 아들을 잃자 일체의 출사 권유를 물리치고 석천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몰두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사서(四書)는 물론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장자(莊子)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했다. 또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훼손된 공맹(孔孟)의 본뜻을 밝힌다는 입장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했다. 이러한 학문 태도로 인해 그는 주자학에 경도된 당시의 지배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비난을 받았다.
1702년에는 백현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에 송시열(宋時烈)을 낮추었다고 해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받기도 했다. 송시열에 대한 비판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학문은 당시 통치이념이었던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의 학문 태도에서도 비껴 서있었다. 결국 백현신도비명과 <사변록> 필화로 유배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는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했던 도가사상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노장서(老莊書)에 심취하는 자유로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서계의 학문은 당대 빛을 보지 못했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지성과 실천에 바탕을 한 애민사상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채 소중한 정신 문화유산으로 면면히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