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써 일거리를 만들어서 옮겨심은 대파. 지금은 철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모든 게 실험이다
김수복
그러고 보면 봄비라는 것이 이게 그렇다. 이슬 같기도 하고 비 같기도 하고 이름을 붙이기가 애매하다. 게으른 사람 낮잠 자기 좋고 부지런한 사람 일 하기 좋다는 옛말이 있는데 봄에 내리는 비가 대개 그렇다. 그래서였을까. 시간은 아직 5시도 안 되었건만 사방이 벌써 침침해지기 시작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인데 이웃집 할머니께서 옴팍 젖은 몸으로 손수레를 밀며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땀박땀박 한 걸음씩을 어렵게 옮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웃집 할머니라는 것조차도 못 알아보았다. 어디서 무슨 고물을 수집하는 사람이 마을에 들어왔다가 비를 만났던가보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트럭이 있을 것이다. 얼른 지나가 주기를 바라며 서 있는데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행동거지가 낯익다. 손수레에 실린 것도 폐지가 아니다. 고추밭 멀칭으로 쓰는 비닐이며 삽이며 호미 같은 것들이다. 그제야 깜짝 놀라 차 문을 열고 내리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아니 지금 뭐 하고 오시는 거예요?"
"아이고 쩌그 머시냐 저, 꼬추밭에……."
"비 오는 날은 일 하지 마시라니까요. 왜 자꾸 그러세요."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는데, 할머니 또한 이상하리만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 쩔쩔매며 설명 아닌 해명을 하시고자 애를 쓰는 형국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무례하게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까지도 할머니를 윽박지르고 있었고, 할머니는 거의 진땀을 빼다시피 나를 진정시키고자 애를 쓰시는 거였다.
그랬다. 그때 내가 본 사람은 이웃집 할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치매라는 아주 몹쓸 진단을 받기 전까지의 어머니를 그때 나는 만나고 있었다. 빗줄기가 약할 때는 일하기 딱 좋다고 밭일을 하고, 빗줄기가 세찰 때는 비 오고 나면 밭에 못 들어가니까 얼른 해야 한다는 핑계로 또 밭에서 나올 줄을 모르던 시절의 어머니가 그렇게 옴팍 젖은 몸으로 손수레를 끌며 땀박땀박 힘에 부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도대체 뭐여. 새끼들 애태워서 죽일 일 있어? 왜 이렇게 비만 오면 밭에서 나올 줄을 모르는 거냐고요."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시절의 일이었다. 비 오는 날 밭에서 일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도 처량하고 한심하고 불쌍하고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수사를 붙여도 모자랄 정도의 하여튼 참을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미친 듯이 그야말로 방방 뛰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안 그럴게."
이 한 마디, 어떻게 그렇게도 이 한 마디는 잘도 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도 당신 입으로 내놓은 말을 금방 잊어버리고 도로 밭에 쭈그리고 앉을 수 있는 것인지. 불가사의도 그런 불가사의가 없었다. 훨씬 나중에서야, 그러니까 내 임의로 땅에 호박도 심고 고추도 심고 참외도 심고 그러기 시작한 뒤에서야 빗속에서 일하는 재미가 매우 쏠쏠하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는 나는 여전히 빗속에서 일하는 노인들을 보면 금방 무슨 사단이라도 터질 것처럼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이웃집 할머니 또한 그랬을 것이다. 아들내미 딸내미로부터 숱하게 그런 지청구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갑자기 화를 내며 지청구를 주는 이웃집 젊은 남자가 순간적으로 당신 아들인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나는 할머니에게 더러 잔소리를 하고는 했었다. 처음 만났던 오 년 전부터 지금까지 만날 때마다 그래 왔었다. 오전에 세 시간 오후에 세 시간 그렇게 하루 여섯 시간씩만 일을 하세요. 비가 올 때는 절대로 밭에 가지 마세요. 관절염은 쪼그려 앉아서 일하는 것이 제일 나쁜 거예요, 등등 그렇게 할머니에게는 그야말로 씨도 안 먹히는 잔소리를 참 많이도 했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보자마자 대뜸 화를 낸 적은 없었다. 화를 내기는커녕 언제나 지나가는 말처럼 웃으면서 했었다.
그런 내가 갑자기 화를 냈다. 할머니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렇게, 여우비에라도 홀린 것처럼 가늘게 내리는 봄비 속에서 잠시 딴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깜빡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서로가 민망해서, 실없는 웃음이나 흘리다가 제대로 된 인사조차도 없이 허둥지둥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야 이거 내가 왜 그랬지? 여든도 넘은 할머니에게 그런 무례를 범하다니. 이 사건을 어떻게 수습하나. 그런데 이게 또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과 같은 것을 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잠시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했던 것 같네요. 이런 바보 같은 소리를 어찌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소심하게도 그런 걱정으로 밤새 뒤척거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가.
밤이 지나고, 아침도 한참이 지나서야 밖으로 나갔다. 떠오르는 햇살 속으로 여느 때와 똑같이 손수레를 끌고 밭으로 가시는 할머니와 마주쳤다. 할머니의 밭은 내가 사는 집 뒤편에 있었고, 거기까지는 내가 사는 집을 오른쪽에 끼고 백여 미터나 되는 언덕을 올라야 했다. 때문에 할머니는 언제나 내가 사는 집 마당 입구에 멈춰 서서 한숨을 돌리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