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사적관을 보고 씁쓸한 이유

윤 의사 거사 78주년, 거사지 상해 루쉰 공원에 가다

등록 2010.05.04 16:36수정 2010.05.0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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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공원 엑스포 홍보 공원 내에는 상하이엑스포를 홍보하기위해 꽃 단장을 해놓은 곳이 여러군데 보였다.
루쉰공원 엑스포 홍보공원 내에는 상하이엑스포를 홍보하기위해 꽃 단장을 해놓은 곳이 여러군데 보였다.김철관

지난 4월 30일 오후 1시 중국 상하이엑스포를 하루 앞둔 상하이(上海) 시내는 축제 분위기를 연상케 했다. 호텔은 물론 시내 길목마다 마스코트 '하이바오'와 엑스포 심벌이 새겨진 깃발이 나부꼈다.

공교롭게도 바로 전날인 29일은 78년 전(1932년 4월 29일 낮 12시 40분경) 이곳 상하이 홍커우 공원(현재 루쉰 공원)에서 일왕 생일(천장절)과 상해사변 승리 축하 기념일을 맞아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단행한 날이다. 중국 상해를 출발한 기내에서 신문을 보니 상해 의거 78주년을 맞아 윤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충의사에서 추모다례가 열렸다는 보도를 접했다.

숙소인 상해 포동신구 노산로 600번지에 있는 명성호텔(明城大酒店)에 도착하자마자 여장을 풀고 호텔 종업원들에게 홍커우(虹口) 공원을 물어봤다. 안내지도를 보니 홍커우 공원이라는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호텔직원과 호텔에 투숙한 여러 사람에게도 홍커우 공원을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중국어를 못해 의사소통의 어려움도 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한자를 배운 세대였기 때문에 호텔에 비치된 중국 한자 지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했다.

마스코트 상하이엑스포 마스코트 하이바오
마스코트상하이엑스포 마스코트 하이바오김철관

상해를 함께 왔던 오세철 작가(충남대학교 사진학 강의)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가닥이 잡힌 듯했다. 한자권인 일본대학에서 대학원까지 나온 수재 사진작가여서 한자를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호텔로비에 비치된 노트북에 '尹奉吉'을 쳐, 검색을 해 홍커우 공원이 루쉰 공원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냈다.

이곳을 올 때 역사적인 상하이엑스포 개막 관람에 목적을 뒀다. 하지만 상해를 온 이상 윤봉길 의사 의거지 홍커우 공원과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상해 임시정부를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여행 패키지로 온 것도 아니고 거기에 중국말을 잘하는 여행 가이드도 없어 막막했다.

이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주소를 찾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국식당이 필요했다. 마침 명성호텔 주변에 조선족이 운영하는 '가원'이라는 한국음식점이 있었다.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시켜놓고 오 작가는 임시정부 위치를 알아보았다.

식당 주인 겸 경리인 강연순(48)씨는 조선족으로 남편과 함께 한국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날 시원한 칭다오맥주에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맛이 제법이었다. 상하이엑스포 개막일인 1일 늦은 저녁(10시경)에도 이곳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아주머니가 아주 친절했다. 계란찜과 싱싱한 포기김치를 서비스로 줬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공원을 찾는 상해 인민들 4월 30일은 휴일이라서 많은 상해 사람들이 공원을 찾아 휴식을 했다.
공원을 찾는 상해 인민들4월 30일은 휴일이라서 많은 상해 사람들이 공원을 찾아 휴식을 했다.김철관

어쨌든 점심식사를 마치고 무작정 택시를 탔다. 윤 의사 의거지인 루쉰 공원으로 향했다.  가면서 지도를 확인해 보니 공원에 도착한 것 같았는데, 운전수가 계속 주변을 도는 느낌이었다. 지도와 밖의 표지판을 보니 다 온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해 지리를 잘 모르는데다 중국어를 몰라 따질 수도 없었다. 속병이 도지는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한 후 루쉰 공원에 도착했다.

루쉰 공원은 상해 쓴촨북로 2288호에 위치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후문이었다. 휴일(31일 오후 토요일, 주5일제)이라서 그런지 중국 상해 인민들이 만원이었다. 동호인끼리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 배를 탄 사람, 물건을 판사람, 식사를 한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여가를 보내는 듯했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상하이엑스포를 홍보하는 장식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런 휴양지가 78년 전 의거를 했던 곳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공원이 예상 외로 너무 크고 아름다웠다. 길게 늘어진 호수에서 배를 타고 한가롭게 떠다니는 사람들, 포커를 치면서 즐거워하는 아저씨들, 어린 아이를 재우기 위해 등을 천천히 두드리는 아주머니 등 우리가 사는 모습과 흡사했다.

호수 공원 아에 길나란 호수가 가로질러 있다. 많은 시민들이 배를 타고 휴식을 취했다.
호수공원 아에 길나란 호수가 가로질러 있다. 많은 시민들이 배를 타고 휴식을 취했다.김철관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윤봉길 의사(1908~1932)의 의거지를 찾는 일이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중국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손짓 발짓을 해가면서 물어 봤지만 윤 의사의 의거지가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루쉰 공원을 가면 윤 의사 사적관 표지판이 우리를 반길 것이라는 예상이 크게 빗나갔다. 공원에서 30여 분을 허비했다. 한 일이라곤 구석구석 사진을 촬영하는 일이었다.  물론 사진도 찍고 공원을 구경을 했으니 허비한 시간은 아니었다. 어쨌든 윤 의사의 의거지를 찾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70~80대 노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尹奉吉'을 한자로 써 묻자, 손짓을 하면서 가는 방향을 알려줬다. 그곳을 향하니 윤봉길 의사의 의거지에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입구 매표소 현판은 한글로 '매원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이라고 새겨져 있고, 입장료는 15원(위안)이었다.

물론 중국어로도 똑같이 적어 놓았다. 하지만 매표소 현판에 윤봉길 의사의 호인 '매헌(梅軒)'을 매원(梅원)이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한자로 쓴 '원'은 입구(口) 안에 원(元)이 들어가 있었다. 정문 입구 설치된 흘림체 현판도 마찬가지였다.

루쉰공원 정문 한가롭게 휴식을 즐기는 상해 인민들이 들어가고 나가는 모습이다.
루쉰공원 정문한가롭게 휴식을 즐기는 상해 인민들이 들어가고 나가는 모습이다.김철관

귀국해 한자 옥편을 들고 '원'을 찾아봐도 그런 한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우리 정부가 나서 중국 정부 측에, 정문과 매표소 현판 글 중 윤 의사의 호를 '매원'에서 '매헌'으로 수정을 요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윤 의사의 호가 잘못 표기된 한자를 보면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이때가 오후 3시경이었다. 15위안을 주고 매표소에서 표를 사 윤봉길 의사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순간 이곳을 찾은 20여 명의 한국인들이 보였다. 대부분이 말끔한 양복 차림이었다. 자세히 쳐다보니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과 수행원들이었다. 의거 현장이 표시된 돌비석 앞에서 정몽구 회장은 묵념을 했고, 한참 동안 서 수행원들과 윤 의사와 관련된 얘기를 주고받는 듯했다.

1일 오전 상하이엑스포 개막식 한국기업연합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하루 전, 상해에 도착해 먼저 이곳에 왔다고 한 관계자가 귀띔을 했다. 입구를 들어서 윤봉길 의사 거사 현장에 잠시 묵념을 했다. 조그만 돌에 중국어로 '윤봉길 거사 현장'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바로 옆에 큰 돌비석에는 한국어(흐릿한 녹색 글씨)와 중국어로 '윤봉길 의사 업적'을 소개해 놓았다. 비석에 새긴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그대로 소개해 본다.

정몽구 회장 참배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거사현장 돌비석을 보고 묵념을 한후 비석을 바라보고 있다.
정몽구 회장 참배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거사현장 돌비석을 보고 묵념을 한후 비석을 바라보고 있다.김철관

윤봉길 의사 사적관 입구 매표소 현판과 정문 현판이 윤 의사의 호 '매헌'을 '매원'으로 표시하는 보인다. 빨리 수정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윤봉길 의사 사적관 입구매표소 현판과 정문 현판이 윤 의사의 호 '매헌'을 '매원'으로 표시하는 보인다. 빨리 수정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김철관

윤봉길 의사의 업적 소개

윤봉길(호 : 매헌 梅軒) 의사는 한국인으로서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에서 태어나 일찍이 항일구국투쟁에 투신하여 1930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왔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일본침략군이 이곳에서 상해사변 전승축하식을 거행할 때 하객으로 가장하고 행사장에 들어와 폭탄을 투척하여 상해 주둔 일본 파견군 사령관 사라카와 대장 등을 폭사시키고 여러 명의 일본 주요 관원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현장에서 체포되어 1932년 12월 29일 일본 가네자와에서 장렬하게 일생을 마쳤다."

돌비석으로 표시된 의거지를 출발해 우거진 숲을 지나자 윤 의사 사적관이 나왔다. 전통 중국풍이 물씬 풍긴 2층짜리 건물이었다. 먼저 2층으로 올라가 안을 살피자 '매헌 윤봉길의사 생애사적 전시관'이라고 적힌 현판 밑에 의사 흉상과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매표소와 달리 이곳에는 올바르게 윤 의사 호 '매헌'이 표기돼 있었다. 초상 앞에는 하얀 꽃이 놓여있었다. 잠시 묵념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 그곳을 둘러봤다.

윤 의사 사적관 전통 중국풍의 건물로 사적이 1~2층으로 전시됐다. 1층은 정문으로 들어가지만 2층 사적관은 뒷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윤 의사 사적관전통 중국풍의 건물로 사적이 1~2층으로 전시됐다. 1층은 정문으로 들어가지만 2층 사적관은 뒷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김철관

사적비 윤 의사가 거사 지점이 표시된 비석(작은 비석)과 윤 의사 업적이 소개된 비석(큰 비석)
사적비윤 의사가 거사 지점이 표시된 비석(작은 비석)과 윤 의사 업적이 소개된 비석(큰 비석) 김철관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운동, 농촌계몽운동, <농민독본> 4권 저술 등의 윤 의사 생전 활동이 자세히 소개돼 있었다. 후세들의 윤 의사 숭모 및 추모 활동과 1962년 윤보선 대통령이 내린 건국공로훈장증과 훈장도 전시했다.

1층 전시관에는 윤 의사가 의거에 사용한 폭탄 모형, 폭탄을 제조해준 중국인 고 왕백수와 고 김홍일씨의 사진, 태극기 앞에서 윤 의사가 총과 수류탄을 들고 결의를 다지는 사진, 1932년 12월 19일 오전 가나자와 육군공병작업장내 외진 곳에서 총살을 하기 위해 결박하는 사진 등이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이때 나이 24살. 윤 의사는 이렇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장렬히 순국했던 것이었다.

사적관 바로 뒤뜰에 매점이 있었다. 윤의사와 관련된 기념품을 파는 듯했다. 하지만 주로 중국 기념상품을 팔았고 윤봉길 의사와 관련된 것은 조그만 한 수첩 크기의 화보집뿐이었다. 상해 매헌 윤봉길기념관에서 제작한 화보였다. 화보집에는 윤 의사 초상 가족사진, 거사 직전 김구선생과 촬영한 사진, 유해 발굴 현장 사진, 1946년 6월 30일 국민장으로 거행된 장례식 사진, 효창운동장 묘역과 윤 의사 기념관이 있는 충남 충의사 등이 게재돼 있었다.

윤봉길 의사 초상 사적관에는 윤의사가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 사진이 전시됐다.
윤봉길 의사 초상사적관에는 윤의사가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 사진이 전시됐다.김철관

거사 직전 김구 선생과 촬영한 모습을 보면서 당시 윤 의사가 새로 구입한 6원짜리 회중시계를 이제 필요없다면서 김구 선생이 찬 2원짜리 회중시계로 바꿔 차고 거사를 한 일화가 문득 스쳐갔다.

가족사진을 보니 윤 의사가 상해로 떠나던 날 새벽 아내와 두 아들, 모친 머리맡에 써 놓고 갔던 편지가 떠올랐다. 바로 "丈夫出家生不還,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귀였다. 이 글귀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이날 가족사진을 계속 보고 있으니 윤 의사의 두 아들 종과 담에게 남긴 유서가 생각났다.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이를, 동서양 역사로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프랑스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 윤 의사가 던진 폭탄이 도시락에 감싸져 있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윤 의사가 던진 폭탄이 도시락에 감싸져 있다.김철관

이날 사적관 앞마당은 깔끔했고, 올라 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가자 잔잔한 호수 위에 배를 타면서 즐기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엄숙해야 할 역사적인 사적지에서 흥이나 노는 모습이 솔직히 달갑지 않았다. 우리 땅이 아닌 것이 아쉬웠다. 중국 역사에 윤 의사의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공원을 들어올 때는 후문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나갈 때는 정문을 향했다. 정문으로 왔으면 금방 찾을 수 있었던 윤 의사의 사적관을 한참 동안 찾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곳 윤 의사 사적관에서 정몽구 회장을 안내한 도우미는 이날 오전 이명박 대통령도 루완구 마당로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를 들러 이곳에 왔다는 말을 전해줬다. 또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 직전까지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장이었다는 것도 알려줬다. 루쉰 공원을 나와 택실를 타고 상해 루완구 마당로 306번지 4호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로 향했다.
#윤봉길 의사 의거 78주년 #상해 루쉰공원 사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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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현재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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