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념통 대신 물감... 여든한살에 피어난 봄날

두번째 그림전 '오늘도 봄날이다' 여는 승세 한숙자 여사

등록 2010.05.07 08:51수정 2010.05.07 08:5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여든 살에 첫 개인전을 연 한숙자 여사와 오한숙희씨

여든 살에 첫 개인전을 연 한숙자 여사와 오한숙희씨 ⓒ 오한숙희

바깥양반의 몫을 감당하는 여성학자 오한숙희 대신 집안 살림과 아이들 수발을 맵짜게 해준 것은 숙희씨의 어머니 한숙자 여사였다.


4남매와 손자손녀를 기르는 일만 전념하던 한숙자 여사가 69세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리고 숙희씨는 그 책임이 아이들과 살림살이를 모두 어머니 손에 맡기고 사회 활동에 분주했던 자신에게 있는 것 같은 죄책감과 미안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명강사 겸 방송인이던 오한숙희씨가 수많은 강연과 사회 활동을 가능한 줄이고 둘째 딸 희령을 직접 보살피고 어머니 한숙자 여사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자신의 집에 만든 명상의 집 '해심터'에서 지인 몇 명이 모여 크로키와 데생을 배울 때 함께 하며 그림에 취미를 붙였던 한숙자 여사는 2003년부터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흔넷 나이에 양념통 대신 물감을 집어 들어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던 한숙자 여사는 1·4 후퇴 때 두 동생과 잠시 인천으로 피난한 것이 부모 형제와 기나긴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피난 이듬해 고향사람 오승세를 만나 4남매를 두고  24년간 금슬이 유난히 좋은 부부로 살았다. 1976년 남편과 사별한 후 4남매와 손자손녀를 기르는 일에 전념했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 몽실몽실 피어오르던 열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던지 남들은 하던 일도 손에서 놓는 나이에 한숙자 여사는 그림을 통해 새로운 봄날을 맞이했다. 싱크대 대신 이젤을, 양념통 대신 그림 물감을, 수저통 대신 붓통을 옆에 두고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추억을 그림으로 펼쳐냈다.

a 갤러리 자인제노  5월 1일부터 5월 10일까지 한숙자 여사 그림전  '오늘도 봄날이다'가  열리고 있다.

갤러리 자인제노 5월 1일부터 5월 10일까지 한숙자 여사 그림전 '오늘도 봄날이다'가 열리고 있다. ⓒ 이명옥


2009년 팔순을 맞은 한숙자 여사에게 숙희씨는 그동안 그린 그림을 모아 조촐한 그림전을 열자고 제안했다. "뭘 봐준다고 그래? 늙은이가 장난 논 걸 가지고..."라며 완곡하게 마다 던 어머니를 설득해 <여든, 봄날이 왔다>라는 팔순 기념 그림전을 열었다.


한숙자 여사의 그림을 관람한 사람들은 그림에서 어머니 품 같은 온화함과 따스함, 잃어 버린 고향의 냄새를 맡으며 '그림이 참 따뜻하고 좋다'는 진심어린 찬사를 보냈다. 기교가 넘쳐나는 전형화된 그림이 아닌,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마음으로 마음에 담긴 언어를 붓끝으로 살려낸 어머니의 마음이 그림 앞에 선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림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고들 하니까 부끄럽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잘 그릴 것을..."


그렇게 여든의 봄날은 또 다른 꽃을 활짝 피울 새로운 봄날을 맞이할 준비를 자기 안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오늘도 봄날이다

a 오늘도 봄날이다 승세 한숙자 두 번째 그림전

오늘도 봄날이다 승세 한숙자 두 번째 그림전 ⓒ 한숙자


그림을 통해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한 한숙자 여사는 나눔에 대한 갈망으로 목마름을 느껴야 했다.

"나도 남들처럼 베풀고 싶지만 가진 게 없어 늘 마음뿐이었어. 이번 그림은 마음 닿는 사람들과 나누고 그 돈은 마음 닿는 곳에 나누고 싶어."

밤잠을 줄이고 작품에 매달리면서도 한숙자 여사는 나눔과 소통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에 기뻤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불과 7개월 만에 스물여섯 점의 그림을 완성한 승세 한숙자 여사는 지난 5월 1일부터 자인제노 갤러리에서 <오늘도 봄날이다>라는 전시를 열고 있다.

그림의 제목도 여느 그림전 제목과는 사뭇 다르다.  어딘지 모르게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암호랑이를 그린 그림의 제목은 '암놈이야, 그래서 좀 착해. 순하게 생겼지?'다. 호랑이의 엉덩이에 장난스럽게 똥침을 놓고 있는 까치를 봐도 순한 호랑이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마치 그림이 아니라 어머니와 마주 앉아 조곤조곤 들려주는 어머니의 추억담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제목이 주는 남다름 때문이다.

한달 꼬박 매달려 작품 완성하기도

a 횃불을 든 한숙자 여사 박재동 화백에게 횃불을 건내받은 한숙자 여사와 오한숙희씨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횃불을 든 한숙자 여사 박재동 화백에게 횃불을 건내받은 한숙자 여사와 오한숙희씨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 이명옥


설날 아침 풍경이 담긴 연하장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은 박재동 화백은 작품에 대해 이런 평을 했다.

"저 그림에는 맛있는 거 실컷 먹고 제일 좋은 옷을 차려입고 하루 종일 신나게 놀던 가난한 그 시절 최대의 로망이 모두 담겨 있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어 마음이 저절로 따뜻해진다. 저런 그림이 바로 진짜 그림이다."

달마대사의 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섯 번이나 다시 그렸다는 오한숙씨의 회상과는 달리 한숙자 여사는 "아냐. 세 번 밖에  안 그렸어"라고 대답한다.

오한숙희씨가 관람객에게 인사를 하며 남긴 말이 재미있다. 

"어머니는 일곱 달 동안 팔도 안 아프신지 정말 열심히 작품에 몰두하셨어요. 백두산을 그린 '백두산 천지에 꽃이 피이 온 천지가 봄이네'라는 작품을 그리실 때는 그 작품에만 한 달 가량이 걸렸어요. 천지 못을 칠하는 데 하루 밖에 안 걸렸는데 꽃을 그리느라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거지요."

"어느 날  친구들이 나보고 어머니를 고생시킨다고 뭐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어머니는 가만히 계셔도 팔이 쑤신다고 여기 주물러라 저기 주물러라 하셔. 이제 어머니 좀 그만 괴롭혀 드려라'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팔 하나도 안 아프다고 하시던데' 그랬더니 어머니가 옆에서 내 팔을 잡아당기며 조그만 소리로 '야, 나도 팔 조금은 아파' 그러시더라고요(웃음)."

a 입구에 놓인 도록과 가방  한숙자 여사의 작품이 담긴 가방과 도록 타일에 그려진 소품은 저렴한 값으로 소장 할 수 있다.

입구에 놓인 도록과 가방 한숙자 여사의 작품이 담긴 가방과 도록 타일에 그려진 소품은 저렴한 값으로 소장 할 수 있다. ⓒ 이명옥


이번 전시는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연 것이라 한숙자 여사의 기쁨이 더 크다. 한숙자 여사가 그린 스물여섯 점의 그림과 도록, 한숙자 여사의 작품이 담긴 가방, 작품을 소장하지 못하는 이들이 그림을 소장할 수 있도록 타일에 그린 작은 소품까지 판매 수익은 한숙자 여사가 마음에 둔 다섯 군데의 나눔 몫으로 쓰인다.

어버이날 특별공연도 열려요
부모님 손잡고 와서 흥겨운 우리 가락에 어깨춤을 추어 봅시다.

일시: 5월 8일 오후 3시
장소: 갤러리 자인제노
영상: 다시 보는 어머니, 새로운 잔치
공연: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연락처: 02-737-5751
http:// www.zeinxeno.kr

모시고 온 부모님께는 선물도 드린다고 합니다.

자인제노(Zein Xeno) 갤러리는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직진 '플라워 특별시' 꺽어져 들어가세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 낸 여자로서, '남북어린이 어깨동무'는 통일을 염원하는 실향민이라서, '한국여성재단'은 여성 한부모 가장의 어려움을 겪었기에, '한울안 운동'은 평화와 상생을 지향하는 뜻에서, '동물보호재단 카라'는 가족으로 의지하고 살았던 애견 잔디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정한 나눔의 장소라고 설명했다. 

그림을 통해 행복한 소통과 나눔을 실천하며 새로운 봄날을 맞이하고 있는 여든 한 살 한숙자 여사로서는 '오늘도 분명 찬란하고  아름다운 봄날이다'. 한숙자 여사의 그 아름다운 봄날에 늘 향기로운 꽃들이 가득 피어날 것을 소망해 본다.
#한숙자 여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3. 3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4. 4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5. 5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