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아내... 우린 셋이 결혼한 거야

[기획-스승과 제자①] 학생에서 동지로, 중매쟁이로... 이런 제자 또 없습니다

등록 2010.05.13 12:44수정 2010.05.1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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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는 인연이란 걸 믿지 않았다. 그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소재로 삼기 위해 그럴 듯하게 꾸며낸 이야기쯤으로 여겼다. 아니면 연인들끼리의 만남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엮기 위해 억지춘향 격으로 끌어다 붙인 것으로 치부하곤 했다. 적어도 그와 만나기 전까지는.

내 나이 스물하고도 여덟, 이 세상 어디에 내놔도 자신만만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호기롭던 그 시절, 그를 만났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내가 교사로 만난 첫 번째 학생이었고, 제자에서 친구로, 지금은 함께 세상을 고민하는 동지가 되어 있다.

'후달달' 첫 수업, 초보교사 정신 번쩍나게 한 말은

a  새내기 교사가 다 그렇듯 첫 수업 시간은 잔뜩 긴장한 탓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한데... 자칫 아이들로부터 신출내기라며 놀림 당하기 십상인 그때다. 사진은 영화 <울학교 이티>의 한 장면.

새내기 교사가 다 그렇듯 첫 수업 시간은 잔뜩 긴장한 탓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한데... 자칫 아이들로부터 신출내기라며 놀림 당하기 십상인 그때다. 사진은 영화 <울학교 이티>의 한 장면. ⓒ ㈜커리지필름


배짱 하난 두둑해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청춘이었지만, 여느 새내기 교사가 다 그렇듯 첫 수업 시간은 잔뜩 긴장한 탓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수업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고사하고 50분이라는 시간이 도무지 어떻게 지나갔는지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교사랍시고 교탁 주변을 안절부절 맴돌며 큰 목소리로 횡설수설하는 모습이란, 생각하면 할수록 첫 대면한 아이들 앞에서 민망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수업이 끝날 즈음, 자칫 아이들로부터 신출내기라며 놀림 당하기 십상인 그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던 나를 그는 '단 한마디의 말'로 달래주었다. 그것은 위로를 넘어 이제 막 첫 걸음을 뗀 교사에게 더없는 찬사였으며, 지금껏 13년간 교직에 헌신할 수 있게 한 회초리이기도 했다.

"선생님, 열정적인 수업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학생들이 선생님들에게 진정 바라는 건, 지식이나 수업 기술이 아니라 열정이거든요."

그의 단 한마디 말에 난 '열정적인 교사'로 거듭나야 했다. 그러자면 아이들 앞에서 당당해야 했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지식이 아닌 삶으로 그들 앞에 서야 했다.


생각컨대 교사의 열정이야말로 교육을 진정 교육답게 한다. 열정이 없다면 아이들로 하여금 어떠한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생활지도는 폭력과 다름 아니며, 감동을 주지 못하는 수업은 그저 수험용 지식을 머릿속에 꼬깃꼬깃 구겨 넣는 시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를 통해 배웠다. 교직을 준비한 대학 4년 동안의 배움보다 그 말 한마디가 훨씬 더 큰 깨달음을 주었다.

담임교사도 아닌데다 일주일에 기껏 두 번 만나는 사이였지만 이내 가까워졌고, 그와 함께 교사가 되면 반드시 꾸려보겠노라 마음먹었던 문화유적 답사 동아리도 만들었다. 매일 야자(야간자율학습)는 물론 주말에도 등교해야 하는 숨 막히는 고등학교 생활에서 동아리 활동은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을 만큼 사치스러운 일이었지만, 수능 공부를 제쳐놓은 듯 그는 열심히 활동했다.


1년에 네 번, 계획 단계부터 다녀온 후 답사자료 발간과 사진전 작업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야자가 끝난 밤늦은 시간이나 주말 저녁 시간을 쪼개 교무실 한쪽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답사자료도 정리하고 함께 공부하고 토론도 하며 우리 둘은 시나브로 사제지간에서 동학(同學)이 되어 갔다.

주위로부터 십년지기 친구로 불렸고, 행동거지와 말투는 물론 생김새까지 서로 닮았다는 얘기도 종종 들었다. 공부를 아주 잘 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가르쳤던 국사과목만큼은 늘 첫손가락에 꼽혔다. 출장이라도 가서 학교를 비울라치면 아이들은 그에게 가서 모르는 문제를 질문할 정도였다.

결혼식날, 난 예물시계 3개를 마련했다

ⓒ 오마이뉴스

그가 대학에 진학한 이듬해 스승의 날 즈음으로 기억한다. 간만에 만난 그의 곁에는 낯선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어쩐지 여자 친구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중학교 때의 선생님이라고 했다. '오지랖도 넓지, 졸업한 지 5년도 더 지난 지금, 스승의 날이랍시고 중학교 때 선생님을 찾다니.' 길거리에서의 짧은 만남은 그렇듯 시큰둥했다.

하긴 그 전부터 그 선생님 얘기를 많이 들었다. 무슨 과목을 가르쳤고, 소풍은 어디로 함께 갔었고, 시험문제는 어떻게 출제하며, 수업시간 특유의 버릇과 말투는 어땠는지 등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수다 떨 듯 쏟아내곤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도 그를 통해 나에 대한 잡다한 것들을 들어야만 했단다. 그닥 궁금하지 않았던 그녀의 삶이 내 안으로 들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로부터 꼭 1년 뒤 그 선생님은 내 아내가 되었고, 어떻든 그는 두 스승의 제자에서 두 스승을 맺어준 중매쟁이가 됐다. 결혼식을 앞두고, 아내와 난 둘이 아니라 셋이 결혼한 거라며 예물 시계를 똑같은 것으로 세 개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에게 보낸 고마움의 표시이자 우리 부부에게 그는 가족과도 같은 존재임을 말하려는 제스처였다.

정작 우리 부부의 것은 장롱 속에 들어간 지 이미 오래지만, 지금도 그의 손목 위에는 그때 건넨 예물시계가 보란 듯 여전히 새뜻하다. 결혼한 지 어느덧 10년, 종종 다투고 서운하고 그러다보면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그와 나눈 예물시계가 자꾸 아른거려 부부싸움은 싱겁게 끝나고 만다. 둘 모두의 제자인 그가 본다면 얼마나 민망해 할까 싶어서다. 이렇듯 그는 우리 부부에게 있어서도 아주 특별한 존재다.

느지막히 찾아낸 제자의 꿈, 변호사

학교에서는 제자이자 친구였고, 우리 부부에게 연을 맺어준 그의 대학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주위의 부러움을 사며 서울로 갔지만, 대학도 학과도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두지 못한 듯 주변만 배회하였다. 입학원서를 쓸 즈음, 반농 반진으로 '영문도 모른 채 영문과 가느냐'며 웃어넘겼지만, 말이 씨가 된 셈이었다. 여느 고3 수험생들처럼 자신의 적성과 진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채 점수에 맞춰 쫓기듯 선택한 탓이었으리라. 그렇게 헤매다 군대를 갔다.

도피하듯 간 군대가 그에게는 외려 약이 된 걸까. 제대하자마자 도서관에 틀어박혀 대학 편입을 준비했다. 문학은 자신에게 맞지 않다며 정치와 사회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다짐을 내보인 지 불과 1년도 채 안 돼 원하는 학과와 대학에 편입해 공부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낯선 서울 생활에 힘들고 지칠 법도 하건만, 손바닥만한 자취방과 학교, 도서관만을 오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외향적인 성격에다 활동적인 그에게는 분명 낯선 일상이었다.

느지막하게 찾아낸 그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권 변호사가 되겠노라고 했다. 어쩌면 '노마드'와 같았던 대학생활도, 제대 후 급기야 법학전문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느닷없는 결심도 그 꿈을 위해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새로운 일을 꿈꾸는 그의 '튀는' 행동은 시나브로 매너리즘에 젖어드는 나를 또 한 번 자극했다.

그 후 얼마 뒤 간만에 술자리를 함께 했다. 낯선 도전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었다. 양극화된 사회의 약자들에게 가장 필요하지만 턱없이 모자란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며 되레 그는 선수 치듯 물었다. 스스로 묻고 답하길 바로 '법'이라는 서비스란다. 그는 법을 통해 소외되고 고통 받는 약자들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했다. 법에 관한 무지와 경제적 궁핍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 편에 서서 정의를 실천해보고 싶다는 거다.

내가 아는 한, 그의 이러한 소신은 다소 두루뭉수리 한 미래 설계일지언정 결코 '립서비스'는 아니다. 그의 힘주어 하는 말을 마치 품평하듯 들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활발한 동아리 활동을 했고, 얼마 간 방황과 고민의 시절을 보냈지만 대학과 학과를 넘나들며 왕성한 지식욕을 채워가며 체득한 그의 삶은 이 땅의 변호사들이 갖춰야 할 소중한 자질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말하자면, 시험에 '올인'하며 밤낮으로 공부만 했던 아이, 몇 해째 골방에 틀어박혀 법전만 달달 외웠던 청춘들이 비록 그 성실성은 인정받는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조건일 수는 없다는 거다.

교사로서, 친구로서, 동지로서 10년 동안 지켜본 그의 삶과 그날 술자리에서 나눈 진솔한 대화는 고스란히 법학전문대학원 진학을 위한 추천서에 담겼다. 그의 특기와 성적, 학교생활 따위를 자랑하듯 장황하게 내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저 추천서 말미에다 결론삼아 이렇게 썼다.

"법조삼륜의 수준이 그 사회의 정확한 수준이라는 말이 있다. 사회의식의 수준일 수도 있고, 그야말로 정의로움의 지수를 일컫는 표현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 최고위층인 법관이 되겠다면서, 되레 기득권에 맞서 약자들 편에 서겠다는 'DNA'를 지닌 이런 친구들이 법조계로 많이 진출해야 우리 사회가 아름다워질 것이라 확신한다."

흔히 교사를 두고 '보람'을 먹고사는 직업이라고들 한다. 보람이란 청출어람의 제자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내겐 그가 있다. 그와의 만남으로 '교육'을 깨달았고, 결혼을 했으며, 부끄럽지 않은 기성세대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당당하게 잘 커 준 그에게 고맙다. 고등학교에서 그를 가르친 교사였다는 게 자랑스럽고, 그로 인해 나의 모자람을 깨닫고 많이 채울 수 있어서 더욱 뿌듯하다.

그는 나의 평생 잊을 수 없는 제자이자, 가장 좋은 벗이며,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듬직한 동지이다. 그와의 남다른 인연을 떠올려보건대, 난 전생에 그와 무슨 관계였을까.

덧붙이는 글 | 저희 가족 블로그(http://blog.naver.com.myhb0211)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저희 가족 블로그(http://blog.naver.com.myhb0211)에도 실었습니다.
#스승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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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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