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 겪은 난리 중 제일 징했제"

30년 전 광주를 생각하며

등록 2010.05.17 14:39수정 2010.05.1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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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인들의 잔인한 진압 장면
군인들의 잔인한 진압 장면5.18재단

"야야! 말도 마라! 내가 일제 때 대동아전쟁부터, 여순사건, 6·25, 광주사건까지 난리를 네 번이나 겪었지만 군인들이 이렇게 잔인하게 군것은 처음이여. 아주 징했제."

당시 팔십이셨던 친구 어머니가 하셨던 말이다. 삼십 년 전 전남대학교 3학년이던 친구들은 살벌한 광주를 피해 시골에 도피해 있다가 학교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광주로 돌아왔다. 누가 죽었다느니, 붙잡혀가 아직 감옥에 있다느니 하는 뒤숭숭한 소식에 마음이 안 잡혀 친구 어머니를 찾아 문안인사 드리러 갔을 때 들은 얘기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3명은 군대를 갔다 와서도 같은 과를 다녔다. 취미와 성격도 비슷한 친구들은 항시 같이 붙어 다니며 친구 집에 가서 자기도 했었다. 무사히 다시 만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화제가 다시 광주 사건 이전으로 돌아갔다.

부마항쟁에 이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12·12 쿠데타로 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오랜 독재통치를 벗어나 이제 드디어 민주주의가 실현될 거라는 부푼 꿈에 젖어 있었다.

전국 모든 민주세력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이제 곧 자유 민주주의가 올 거라고 착각했다. 대학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까지 정권의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던 학도호국단 중심의 총학생회가 없어지고 각 대학에서 처음으로 자유 투표에 이은 총학생회가 구성됐다.

거의 모든 대학가에서는 민주화를 외치며 그 동안 쌓여있던 불만을 토로하고 활발한 논의가 진행됐다. 1980년 4월 어느 날이다. 인문사회대학교 학생회장으로 당선된 고등학교 후배가 찾아와 부탁이다.

"형님, 학생회 간부들이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지 도통 내말을 안 먹어줘요. 총무부장 직책을 맡아 학생회 일을 도와주세요. 군대 제대한 형님이 자리에 앉아 계시기만 해도 말을 들을 것 같아요."
"나는 앞에 나서는 체질이 못되는데."


몇 번이나 거절했으나 소용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떠맡은 총무부장 직책이 내 운명을 갈랐다. 군부에서는 학생들에게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라!"라는 경고음이 몇 번 나왔다. 정보가 빨랐을까? 서울대를 비롯한 모든 대학이 5월 13일을 기점으로 조용해졌다.

광주의 5월 14일부터 5월 16일. 전남대학교에서는 교수들이 태극기를 들고 앞장서고 학생들이 뒤따르며 금남로까지 평화시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정국에 대한 분위기 파악이 안 된 학생회실에서는 학생회간부와 몇몇 교수가 야간 농성과 토론을 계속하고 있었다. 


5월 16일 밤 9시.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후문으로 향하는 나를 수위 아저씨가  불러 세웠다. 예비군복을 입고 다니며 항상 인사하는 나와는 농담까지 하는 사이였다.

"학생! 학생! 공부하고 이제 집에 가는 거요?
"예. 무슨 일이라도?"
"금방 향토사단에서 완전무장한 군인을 실은 트럭 열대가 후문을 통해 정문으로 빠져 나갔어요. 송정리 쪽 상무대로 가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나는 거 아니요?"

전방 수색중대를 제대하고 군의 특성을 잘 알던 나에게 퍼뜩 떠오르는 생각 하나. 공수부대 하사관이던 친구가 휴가와 하던 말이 생각났다. "너 대학교 가면 데모하지 마라"며 부마항쟁 때 잔인하게 데모 진압 했던 얘기를 자랑했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자고 난 이튿날 라디오를 틀자 전국에 계엄령과 휴교령이 내려졌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과 만약 휴교령이 내리면 도청 옆 수협건물 앞으로 모이자는 약속이 떠올랐다. 약속 장소에는 학생회 간부들 대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10시쯤이다. 전남일보사 쪽에 주차해 있던 전경버스가 갑자기 사이렌 소리를 내며 전남대학교 방향으로 달리는 게 보였다. 학생들은 시내버스를 타고 전남대학교 정문으로 모여 들었다. 정문에는 철모를 쓴 군인들이 총을 들고 보초를 서 있었다. 저 멀리 종합운동장에는 군인들의 대형 텐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다. 갑자기 장교 하나가 "학생들 5분 내로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로 해산하겠다"고 경고 방송을 했다. 5분 후가 되자 곤봉을 든 군인들이 달려 나오고 학생들은 5백여 미터쯤 달아나 만만한 전경들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수적 열세와 힘에 부친 학생들이 도청 앞으로 가자는 소리와 함께 금남로로 향했다. 금남로에 모인 백여 명의 학생들은 카톨릭회관 앞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경찰과 전경들이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좌농성을 하던 학생들은 페퍼포그를 맞고 뿔뿔이 흩어져 골목골목에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오후 두세 시가 되자 지친 학생들은 거의 다 흩어졌다. 하늘에서는 경찰 헬기가 선회하고  금남로에는 최루탄 연기가 가득했지만 데모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힘없는 학생들과 국민들은 또 다시 구체제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는가 보다며 체념에 빠져가고 있었다. 충장로 모 다방 앞에서 만난 정외과 교수가 말을 걸었다.

"학생 고생이 많네, 모든 역사를 보면 진보에는 보수반동이 있지. 이것도 진보를 위한 아픔이라고 생각하게."

4시다. 대여섯 명의 학생들과 함께 도청 앞으로 걸어 나가려 할 때다. 갑자기 작업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우리를 막아섰다.

"학생들, 나는 광주경찰서 간부요. 학생들 뜻을 알아요. 하지만 얼른 돌아가세요. 내 아들도 대학생입니다. 지금 공수부대가 막 들어왔어요. 내 아들 친구 같은 여러분들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얼른 피하세요."

 "신현확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전국 모든 대학교의 요구사항이었다. 5.18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 대학교수가 앞서고 대학생들이 뒤따르는 평화시위 모습이다
"신현확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전국 모든 대학교의 요구사항이었다. 5.18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 대학교수가 앞서고 대학생들이 뒤따르는 평화시위 모습이다 5.18재단

부마항쟁 때 데모를 진압했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아니 이견을 허용치 않고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군 체제가 생각났다. 무비판적 집단논리에 빠진 군은 적이 아닌 국민을 향해 총구를 돌릴 수도 있다. 남아 도는 젊은 힘. 분출이 필요한 젊음은 희생양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향점 없는 "돌격  앞으로!"가 생각났다.

저만치 우리 과 여교수가 보였다.

"아니 학생! 학생회 간부가 지금도 안 피하고 있으면 어떡해. 철야 농성하던 학생회 간부들 다 잡혀갔어요. 지금 당장 피해요.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요."

그 길로 학생들은 시골로 피했다. 자취방에도 들르지 않고 터미널로 바로 가 버스를 탔다. 집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난 후였다. 광주로 경운기 부속을 사러 갔던 큰 형님이 밤 9시쯤 돌아와 나를 보고 말했다.

"왔냐? 잘 왔다. 광주 지금 난리가 났다. 터미널에 최루탄을 터뜨리고 학생들처럼 보이면 무조건 군 트럭에 싣고 잡아갔다."

잠이 안 온다. 연좌제. 내가 아무리 피해도 사돈에 팔촌까지 찾아낼 텐데 어디로 숨지. 땅굴을? 뾰족한 해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난 것이 바로 위 형이 삼천포 화력발전소 건설현장에 있는 게 생각났다. 삼천포 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으로 가 노가다 일을 했다.

TV에서는 노래와 춤이 계속 흘러나오고 간간히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경고 방송이 흘러 나왔다. "광주는 폭도들이 점령하고 경상도 차들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불순한 세력들이 침투해 선동하고 있습니다…". 지역감정과 색깔론을 자극해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공사 현장 주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전라도 놈들이라고 욕을 하고 있었다. 불타는 방송국과 시위대들.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일만 하는 나를 보고 형은 입 꾹 다물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

 80년 당시 5월에도 민들레가 활짝 피었었다. 바람에 날아간  민들레씨가 땅에 떨어져 새싹을 틔우듯이, 그날의 민들레도 한국 자유 민주주의의  씨앗이 되었다.
80년 당시 5월에도 민들레가 활짝 피었었다. 바람에 날아간 민들레씨가 땅에 떨어져 새싹을 틔우듯이, 그날의 민들레도 한국 자유 민주주의의 씨앗이 되었다. 오문수

열흘 후 광주가 진압되고 탱크와 장갑차 계엄군이 삼엄하게 보초를 선 모습만 방영된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버스다. 사천 비행장 인근 군부대 병력이 버스를 세워 신분증 조사를 한다. 하필 이럴 때 주민등록증을 잃어 버렸다. 철모를 쓴 병장이 전남대학교 학생증을 보고 내리란다.

"군인 아저씨, 나이와 병역 사항을 보세요.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려서 잘못했지만 예비역이고 이 나이에 데모하겠습니까?"
"알겠습니다만 전남대학교 학생 아닙니까?"

휴학하고 군입대했다는 그 마음씨 좋은 병장 때문에 곤욕을 치르지 않고 무사히 현장을 벗어나올 수 있었다. 식당이나 터미널 어디를 가도 광주를 욕하는 사람들. "아 미칠 것만 같다" 오도된 언론, 통제된 정보는 광주를 폭도와 불순분자들이 넘치는 광란의 도시로 몰아갔다.

학생회 간부 직책은 기업체 취직의 길을 막았다. 그 때 기업체에 취직된 친구들은 정년퇴직을 했다. 이걸 보고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하지만 당시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에게 죄스러움이 든다. 매년 5월이 오면.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와 여수신문에도 송고합니다


덧붙이는 글 희망제작소와 여수신문에도 송고합니다
#광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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