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서지리 서낭당이 있는 야산 둘레엔 찔레가 한창이었다.
장호철
서론이 좀 길어졌다. 안동은 흔히들 '양반의 고장'이고 자칭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문화'는 물론 '양반들이 남긴 것'일 터이다. 모르긴 해도 하회에 전승되는 '탈놀이' 따위의 민중문화가 거기 포함되어 있을 걸 같지는 않다.
안동 골짜기마다 들어찬 고택과 정자 등 양반 문화의 흔적에 비기면 민중들이 남긴 삶의 자취는 많지 않다. 그것들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소멸되어야 할 봉건사회의 잔존물로 폄훼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서인가, 이 지역에서 이들 삶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와룡면 서지리에 성황당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풍산읍 마애리 선사유적전시관에서 청동기 유적으로 소개된 전시물을 통해서였다. 전시된 사진 속에서 세 개의 돌이 겹쳐진 삼첩석과 두 개의 돌을 얹은 이첩석이 선명했다. 이 두 개의 돌 구조물 옆에 쌓아올린 돌무더기가 바로 서낭당이었다.
길을 나선 것은 지지난 일요일 오후였다. 네비게이션을 두드리자 이내 '서지리 성황당'이 떴다. 네비는 안동시를 벗어나자 말자 와룡으로 가던 큰 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난 작은 샛길로 들라고 한다. 중앙선 기찻길이 지나는 굴다리를 벗어나자 교행이 불가능한 좁은 시멘트길이 펼쳐진다.
서울 면적의 두 배가 훨씬 넘는 안동이어서 그런가. 골골샅샅에 오지, 벽지도 많은 편이다. 거의 여유가 없는 좁은 시멘트 포장길을 달리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비킬 데도 없는데 마주 오는 차를 맞닥뜨릴까 봐서다. 비교적 도로 사정이 널찍한 경북 남부 쪽에 비기면 '새마을운동'은 이 동네에서만 쉬었는가 싶기도 하다.
그러구러 좁은 길을 조심조심 가는데, 저만큼에서 경운기 한 대가 나왔다. 급하게 길옆 공터에 차를 대고 창문을 열었더니 친절한 노인들은 경운기를 세운다. 성황당이 어디냐니까 바로 위라고, 돌아가면 금방이라 대답하면서 찔레꽃이 무성한 길가 야산을 가리켰다.
차를 버리고 개망초와 찔레꽃이 줄지어 핀 좁은 길을 돌아가는데 세상에, 어디선가 소쩍새가 울고 있었다. 굳이 도시랄 것도 없는 소도시에 살면서도 정작 지척에 이처럼 살아 있는 자연이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부끄럽고 당혹스러워진다. 소형 녹음기를 챙겨오는 건데…, 하고 후회하면서 산모퉁이를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