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4년마다 새로운 응원가 외워야 하나"

월드컵 응원문화, 해 거듭할수록 상업적으로 변질

등록 2010.06.29 19:49수정 2010.06.29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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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3일 새벽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국과 나이지리아와의 거리응원에서 한국 대표팀이 나이지리아와 비기며 사상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붉은악마들이 북을 두드리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23일 새벽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국과 나이지리아와의 거리응원에서 한국 대표팀이 나이지리아와 비기며 사상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붉은악마들이 북을 두드리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 유성호

23일 새벽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국과 나이지리아와의 거리응원에서 한국 대표팀이 나이지리아와 비기며 사상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붉은악마들이 북을 두드리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 유성호

2010 남아공월드컵 '16강 진출'을 결정하게 될 나이지리아전이 열린 지난 23일. 평일에, 그것도 새벽에 하는 경기임에도 강남 영동대로에는 5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시민들의 연령대도 다양했다. 방학을 맞은 대학생들은 부담 없이 광장을 찾았고, 직장인들은 밤을 새워 경기를 본 후 출근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아이 두 명과 함께 광장에 나온 '유모차부대' 여성은 "젊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노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신이 난다"고 말했고, 퇴직한 지 6개월이 되었다는 50대 남성은 "그동안 심심했는데 요즘은 월드컵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며 흥겨워했다. "16강 진출하는 것만 보고 공부하겠다"는 고3 남학생들도 있었다.

 

"응원, 촛불, 노제... 이제는 광장이 자연스러워졌다"

 

모 이동통신사 광고에서 "당신의 Reds는 어디에 있나요?"라고 물을 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월드컵의 열기가 이처럼 뜨거우리라고는. 그도 그럴 것이 지난 3월에 발생한 '천안함 사태'가 6.2 지방선거까지 이어진데다, SBS 단독중계로 인해 방송 3사에서 앞다투어 월드컵 분위기를 띄우던 풍경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월드컵이 시작되자 시민들은 붉은 옷을 입고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한국이 그리스를 2-0으로 이기면서부터 분위기는 더욱 더 달아올랐다. 그리스전 100만, 아르헨티나전 150만, 나이지리아전 50만, 우루과이전 100만. 이번 남아공월드컵 한국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을 때 거리응원전에 나선 시민들의 숫자다.

 

정윤수 문화평론가는 28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광장에 모여서 응원도 하고 촛불시위도 하고 노제도 하면서 이제는 광장이라는 게 (시민들에게) 자연스러워졌다"고 설명했다. "큰 일이 있으면 광장에 가는 게 당연해졌다"는 것이다.

 

"거리응원에 20대 많은 이유는 '놀이문화'가 없어서"?

 

a  23일 새벽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국과 나이지리아와의 거리응원에서 한국 대표팀이 나이지리아와 비기며 사상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붉은악마들이 환호하며 기뻐하고 있다.

23일 새벽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국과 나이지리아와의 거리응원에서 한국 대표팀이 나이지리아와 비기며 사상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붉은악마들이 환호하며 기뻐하고 있다. ⓒ 유성호

23일 새벽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국과 나이지리아와의 거리응원에서 한국 대표팀이 나이지리아와 비기며 사상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붉은악마들이 환호하며 기뻐하고 있다. ⓒ 유성호

특히 월드컵 기간 거리응원전에 나온 시민들 가운데는 20대가 많았다. 지난 26일 우루과이전이 시작되기 30여 분 전, '장맛비 내리는 영동대로'에서 만난 이영찬(27)씨도 그 중 하나였다. 색색의 우비를 입고 응원가에 맞춰 막대풍선을 두드리는 시민들 사이에서, 이씨와 친구들은 흥에 겨운 듯 서로 막대풍선을 두드리며 어린 아이처럼 폴짝 폴짝 뛰었다.

 

한 친구는 어린이 응원단의 춤을 익살스럽게 따라해 다른 친구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씨는 "사람들과 함께 응원하니까 재밌다"며 웃어보였다. 이들은 적어도 응원을 할 때만큼은 더 이상 실업난에 찌든 '무기력한 20대'가 아니었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광장으로 몰려나온 나온 이유에 대해 정희준 동아대 스포츠 과학부 교수는 "놀이문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문화연대 체육분과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한 정 교수는 "젊은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 2차도 술 마시고, 3차도 술 마시거나 극장 가고, 노래방 가는 정도인데, 오랜만에 놀 거리가 생기니까 열광하는 것 같다"며 "거리나 광장에 나가서 축구도 보고, 공연도 보고, 옆에 젊은 남녀가 있으니까 물도 좋고... 나이트 클럽 못지않은 오히려 더 재밌는 놀 거리가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정윤수 평론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정 평론가는 "지금의 20대들은 아주 어렸을 때나 사춘기시절에 '2002년 광장'을 경험해 본 세대"라며 "광장에서 뛰고 춤추고 하는 것이 시각적으로 익숙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정 평론가는 "젊은팬들의 넘치는 열정이 무조건 건강한 것만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축구가 되었든, 촛불시위가 되었든 광장에 젊은이들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무조건 긍정적인 게 아니라, (젊은이들 스스로) '집단적인 군중'이 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 방어 노력이 전제될 때만 아름다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젊은이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자동차 위에 올라가고 버스를 세우는 행동 등을 하게 될 때, 어느 한 순간 정신없는 집단적 군중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거리응원, 해방감이나 일탈감보다는 재벌의 상술에 포획"

 

a  23일 새벽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국과 나이지리아와의 거리응원에서 한국 대표팀이 나이지리아와 비기며 사상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붉은악마들이 어깨에 손을 얹고 기차놀이를 하고 있다.

23일 새벽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국과 나이지리아와의 거리응원에서 한국 대표팀이 나이지리아와 비기며 사상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붉은악마들이 어깨에 손을 얹고 기차놀이를 하고 있다. ⓒ 유성호

23일 새벽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국과 나이지리아와의 거리응원에서 한국 대표팀이 나이지리아와 비기며 사상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붉은악마들이 어깨에 손을 얹고 기차놀이를 하고 있다. ⓒ 유성호

응원문화가 해를 거듭할수록 상업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두 사람이 의견을 같이 했다. 지난 23일 나이지리아전 거리응원이 있었던 영동대로. 오전 1시경 시민들이 스크린 앞에 자리를 잡자, 어디에선가 비닐포장에 쌓인 작은 물체가 응원석을 향해 날아들었다. 포장지를 뜯자 막대풍선과 빨대가 들어 있었다. 빨대를 이용해 막대풍선에 공기를 넣자, 커다란 바게트 모양이 나타났다. 이 제과업체는 이날 4만 개의 막대풍선을 준비했다고 한다. 이날 영동대로 거리응원전에 나온 시민은 5만여 명이었다. 제과업체 관계자들은 "공짜예요, 공짜"를 외치며 막대풍선을 나눠줬다.

 

하얀 바탕에 바게트가 그려진 막대풍선을 든 시민들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 SBS를 시청했다. 경기가 시작되기까지, 시민들은 몇 번이고 같은 광고를 보고 또 봤다. 특히 시민들은 빅뱅과 김연아가 함께 부른 '승리의 함성' 뮤직비디오가 나올 때면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현대자동차와 KT가 공동으로 만든 응원가인 '승리의 함성'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정윤수 평론가는 "피파로부터 중계권이나 공식후원권을 얻어낸 방송이나 기업들의 통제나 관리가 굉장히 잘 적용되고 있는 상업적인 시스템으로 광장이 점점 변질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정 평론가는 "응원가나 응원구호 같은 것도 과거에는 자발적으로 했다고 한다면 지금은 그 장소를 먼저 선점한 기업이나 방송사의 의도와 기획대로 해야 한다"며 "이는 세련되지 못하다"고 꼬집었다.

 

정희준 교수 역시 "2006년만 해도 거리응원은 서울광장이 대표적이었는데 지금은 SKT는 한강, SBS는 코엑스, 현대자동차는 올림픽 공원에 자기네들 응원공간을 따로 만들고 있다"며 응원문화의 상업화를 우려했다.

 

정 교수는 "2002년에는 국가대표팀이 워낙 잘 하니까 시민들이 호기심에 광장에 자발적으로 나갔지만 지금은 SBS나 재벌기업들이 엄청난 양의 광고를 쏟아 부으면서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며 "광장이나 거리에 나가는 게 일종의 해방구가 되면서 일탈감이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재벌의 상술에 포획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 평론가는 4년마다 새로운 응원가나 응원구호를 외워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그는 "골이 터졌을 때 KT에서는 '올레'라고 하는데 부자연스럽다, 김장훈과 싸이가 부른 '다시 한 번 대한민국'도 SKT에서 열심히 했지만 거의 모른다"며 "축구는 단순함 속에 엄청난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어서 단순성만 활용해도 응원이 가능한데 경쟁사 것이니, 옛날 것이니 해서 새로운 응원가를 만들어 내고 외워야 하는 것은 작위적"이라고 비판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 '오~필승 코리아' 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것이다.

 

16강 진출이 결정되는 순간, 시민들은 빨간, 파란, 하얀 막대풍선을 하늘 위로 던졌다. 빨간색, 파란색 막대 풍선 역시 각각 다른 대기업에서 나눠준 것이었다. 이에 대해 21일 '정대세 응원전'이 열린 봉은사에서 만난 '진실을 알리는 시민' 운영진 박은정씨는 "응원가부터 시작해서 응원문화를 대기업이 잠식했다"며 "2002년의 자발적 응원문화가 변질되었다"고 씁쓸해했다.

 

한 누리꾼(@ajinmaum)은 "월드컵을 보는 기쁨도 있지만 스포츠를 이렇게까지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도 듭니다. 장삿속이 없는 축제는 불가능한 것인지"라며 개탄하기도 했다.

#재벌 #붉은 악마 #서울광장 #남아공월드컵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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