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가 기르는 잡종 푸들 바람이는 자기가 앉을 자리 틀리는 법이 없다 언제나 최선의 발 밑 턱을 괴고 지킨다
주인 없는 싸한 시간 푸대접도 이겨내며 기꺼이 내 발치도 마다하지 않을 때는 모멸의 그림자마저 눌러둘 줄 알고 있다
강아지도 제 자리 온 힘으로 지키는데 무성한 소문 가지에 종아리나 맞는 나는 버티고 참아 낼 자리 아직도 찾고 있네.
- 정용국 의 <자리> 전문 -
구차하나마 필자의 졸시 한 수를 내밀며 김연동 선생의 새 시조집 <시간의 흔적> 소개를 시작하려 한다. 집에서 기르는 개는 누가 자기를 제일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그 서열을 알고 있다. 네 식구가 다 있을 때는 작은 아이의 발밑을 지키고 그 다음은 큰 아이, 또 그 아래는 아내, 그리고 마지막 자리에 나를 둔다. 그러나 나 혼자 집에 있을 때에는 푸대접하고 서슴없이 빗자루를 들이대는 내 앞에 올 줄도 안다. 대단한 인내심이며 고수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이 점에서만은 '개만도 못하다'라는 욕설을 피해 가기 어렵다. 정치판에는 자신의 '자리'를 모르는 자 부지기수이며, 사람 사는 곳곳에 자기 '자리' 지킬 줄 모르는 푼수도 다종다양하지 아니한가.
시집을 소개하는 모두에 '자리'를 거론한 이유는 시집 곳곳에서 선생이 '바른 자리'를 지켜내기 위하여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마음을 궁굴리고 있는지 직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적 대상은 늘 시리거나 아팠다' '측은한 마음과 사랑의 눈길을 글속에 던져보기도 하고/ 세속의 하늘에다/ 칼날 같은 언어로 새겨보려 애썼다'라는 시인의 말은 선생이 지켜내려 했던 세상의 자리, 시인의 자리, 인간의 자리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되새겨보게 하고 있다. 시집의 해설을 쓴 유성호 교수도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근원적 감각과 원초적 통일성을 탐색하고 탈환하는 고전적 상상력으로 충일한 시조시학의 한 결정으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고 압축하고 있다.
김연동 시인은 1948년 하동에서 태어나 등단한 이후로 경남 지역에서 교직에 몸담으며 시조를 굳게 지켜온 시인이다. 경남문학상, 중앙일보 시조대상 등을 수상하며 <저문 날의 구도> <바다와 신발> <점묘하듯, 상감하듯> 등의 시집과 최근 펴낸 평론집 <찔레꽃이 화사한 계절>을 상재하였다. 현재는 경상남도교육연구정보원장으로 교직의 마지막 자리에 서 있다. 이 시집의 마지막 4부는 그간 발표해온 작품에서 뽑은 시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들이 재수록되어 있어서 중간 정리를 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바로 이곳에 '노을' '탁본' '서호 시장' '광양만에서'등 그의 명편들이 들어 있다.
재수록된 작품들을 살펴보아도 '자리'에 대한 생각은 늘 그에게 중요한 화두였음을 알게 된다. '분칠한 야한 바람에 새순 잘리고 있던/ 망월동 어디에선가 피 발린 비경 같은 처절한 비명소리'에 치를 떨었고, '흔들리는 가늠자 끝 그 시린 나날들이/ 뒤척이며 내려앉는 구겨진 화선지에/ 찍어도 찍히지 않는/ 물먹은 낙관 하나'에 가쁜 숨을 몰아쉬었으며, '가난한 지느러미가 파도를 털고' 있는 서호 시장 저잣거리에서 가난한 이웃을 만난다. '둥지를 빼앗긴 파도가/ 배고픈 철새로' 울고 있는 광양만에서는 준설에 바둥거리는 해안선의 슬픔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2.
재수록 작품을 제외한 40편의 작품들에도 세상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하다. 특히 힘들고 지치기 쉬운 '오름길' '무거운 짐' '험한 길' '병든 소' '휘어진 정강이 뼈' '비탈진 꽃길' '가난한 이력' 등의 시어들만 보아도 인간의 '자리'가 얼마나 고된 길인가를 느낄 수 있다.
사람 사는 어디엔들 길이야 없겠는가
넘친 삶 비우고 나면 새살처럼 차오르는
더딘 길 올레를 찾아 느릿느릿 걷고 있다
키보다 더 웃자란 허욕을 등에 업고
지름길 내달리다가 잃은 것 또 얼마인가
상처 난 시간을 도려 풍장 하듯 날린다
해풍에 눅눅해진 땀 절인 겉치레를
파도에 씻은 얼굴 햇살 앞에 벗어 널면
혼자서 가야할 길이, 오름길이 보인다.
- <길> 전문 -
길은 우리가 살아온 궤적이다. 과거를 살펴보면 그가 어떻게 미래를 살아가게 될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길은 인생이며 역사인 것이다. 위의 작품 외에 <흔들리는 꽃길> <고향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시편들이 있고 또한 많은 시 속에 '길'이 나온다.
그런데 거의가 순탄하지 않은 길들이다. '등날처럼 일어선 길' '혼자서 가야할 오름길' '흔들리는 길'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천근을 더하는 길' '허욕을 등에 업고 내달리던 지름길' '등줄기 서늘한 길' '적멸로 이어진 길' '갈비뼈로 허기 가린 그 삶보다 험한 길' '언제나 차가왔던 장터목산장 길' '내 삶의 비탈길' '처연히 넘어온 그 길' '길 위의 길' 등 반듯하고 신명나는 고속도로 같은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고달픈 인생길' 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지고 보자면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 신나고 웃음 넘치는 일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래도 선생은 '비우고 나면 새살처럼 차오르는'삶을 믿으며 '상처 난 시간을 도려 풍장하듯 날리' 고 '파도에 씻은 얼굴'로 꿋꿋하게 앞장을 서서 나간다. 우리는 그 위안을 받으며 등 따스한 시인을 따라 나서게 될 것이다.
3.
내 삶의 비탈길은
가을에도 허기 들어
문명의 무거운 짐
볕살 아래 내다걸면
처연히
넘어온 그 길
등날처럼
일어서고
질정 없는 바람 앞에
상한 눈
이마 위로
죽비를 후려치듯
후조 울음 날 세운다
저무는 갯벌에 서서
목을 뽑고
귀를 연다.
- <갯벌에서> 전문 -
역시 힘들고 고달픈 길 이야기다. 먹을 것이 지천인 '가을에도 허기 들어' 있으니 얼마나 힘든 인생인가. 그래도 '무거운 짐 / 볕살 아래 내다 걸' 고 눅눅해진 삶을 말리고 추스른다. 결국 시인은 '질정 없는 바람 앞에/ 상한 눈/ 이마 위로/ 죽비를 후려 치' 는 곤경 앞에서도 유장한 대단원을 제시한다. '목을 뽑고/ 귀를 연다' 대단한 예단이며 시원한 마무리이다. 있는 힘을 다하여 목을 뽑아 내다보고 귀를 열어 경청하면 아무리 허기진 세상이라 하여도 뽀송뽀송해지리라 믿고 싶다.
시인은 예언자라는 말이 있다. 민초와 아픔을 같이 하며 길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선지자이기도 한 것이다. 넓게 내려다보고 아래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그 '자리'가 세상의 자리, 시인의 자리, 곧 인간의 자리일 것이다. 선생의 바람대로 늘 시리거나 아팠던 대상들까지 모두 당신의 오지랖 안에 들여 놓고 애면글면 하는 일 조차 행복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선 삶의 길섶, 애증의 교차점에
아름다운 시간들이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야겠다
- (시인의 말) 일부 -
지난 번 시조 행사장에서 정년을 여쭈었더니 이제 물러날 판이라 하셨다. 교직을 마치고 한가한 시간이 되면 시인은 더 많은 '시리고 아픈' 상처를 찾아 나서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천생 '시인의 자리'인 것을 어쪄랴. 선생이시여 (칠월, 순천만)에서 그 답을 찾아드리니 '세속의 휘장 같은 걸친 옷 벗어놓고' '힘겨운 삶의 무게를 반쯤 덜고 돌아' 오시기를..... <시간의 흔적> 한 권으로도 올 여름 휴가 길 말동무는 충분하리라.
2010.07.02 15:52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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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흔적
김연동 지음,
고요아침,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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