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출생 당시의 태(胎)를 보관한 경종대왕태실비.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 있다. 왕실에서는 왕족이 출생하면 그 태를 따로 보관했다.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그런 숙종이 첫아들을 얻은 때는 숙종 14년(1688)이었다. 이때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윤으로서 훗날의 경종 임금이다. 당시 후궁이었던 장희빈과의 관계에서 숙종의 제1왕자가 태어난 것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아들을 얻어서 그랬는지, 숙종은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이윤 중심의 후계구도를 조기에 정착시키고자 했다. 송시열이 이끄는 다수당인 서인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윤의 세자 책봉을 추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는 정치적 결단까지 내렸다. 이윤의 앞길에 방해가 될 만한 요인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숙종은 결국 숙종 16년(1690)에 만2세가 된 이윤을 세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윤을 세자로 책봉한 데에 이어 같은 해에 장희빈을 중전에 책봉함으로써, 숙종은 이윤의 지위를 한층 강화시켜 주었다.
드라마 <동이>의 스토리를 따를 것 같으면, 이 과정에서 최숙빈이 이윤의 세자책봉을 극렬히 저지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자책봉 문제로 정계가 시끌벅적하던 시기에, 최숙빈은 '감히' 나설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본래 침방나인(바느질 담당 궁녀)이었던 최씨는 인현왕후 시절에 지밀나인(왕·왕후·대비 등의 시녀) 생활을 했다가 왕후 폐위와 함께 원래의 침방으로 되돌아갔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세자책봉 문제를 놓고 온 나라가 정치적 씨름을 벌이고 있었던 그 시점에, 침방나인인 최씨는 눈앞에 놓인 일감을 놓고 힘든 씨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최씨가 숙종의 눈에 띄어 하급궁녀 신세를 벗어난 것은 숙종 18년(1692) 이후였다. 이때는 이미 세자책봉 문제가 마무리되고도 2년 가량이나 경과한 시점이었다. 그러므로 이윤의 세자책봉 문제가 논의되던 당시에는 최씨가 그런 문제에 대해 함부로 발언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마음 속으로야 반대하고 싶었는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최숙빈이 이윤의 세자책봉을 저지하려고 동분서주했다는 드라마 <동이>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의 최숙빈이 해야 할 일은 열심히 바느질하는 것뿐이었다.
정치9단 송시열이 사약을 들이켜야만 했던 이유그럼, 드라마 속에서 동이가 하고 있는 역할을 실제로 수행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는 바로 서인 당파의 '영원한 총재'이자 정치 9단인 송시열이었다.